Lucky Charms Rainbow

들불 속의 연약

2023-04-03

“황후 전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갑작스럽게 정전(正殿)으로 뛰어든 시종이 그렇게 외쳤을 때, 놀라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누구도 그녀를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선의 경계를 넘어갈 때까지 서로 신뢰하며 사랑하겠노라 약속하였던 황제마저도 낭패라는 반응을 보였을 뿐입니다.

이 황궁에서 그녀를 진실로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이 몇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그러나 당신은 고생스럽게 살다 끔찍한 병으로 죽은 황후에게 동정심을 느낍니다. 때맞춰 황궁에는 황후가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한영휘는 독자적으로 사건을 조사해 보자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그날부터 황궁에 기괴하고 모독적인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수많은 이들이 어둠을 두려워하며 무리를 짓습니다. 입술에서 입술로, 사람에서 사람으로 건너 가던 말이 더 큰 말들을 불러옵니다. 불안하게 속삭이는 눈길들이 모두 같은 화제를 읊고 있습니다.


‘황후의 혼백이 궁을 저주하고 있다!’

감독: 정희원

출연: 한영휘

한영휘:35
덥습니다.
덥다 못해 고통스럽습니다.
잠에 든지 얼마 안 된 참인데, 영휘는 꿈에서 문득 강한 작열감을 느낍니다.
살갗에 불티가 마구잡이로 달라붙고, 피부가 양초의 심지처럼 타들어갑니다.
벌떡, 요를 박차고 몸을 일으키는 것은 한 순간이었습니다.
일어나 확인하면, 몸은 다행히도 멀쩡합니다.
오늘따라 꿈자리가 뒤숭숭하네요.
한영휘:...!(큰 숨을 토하며 일어난다.) 아, 꿈이었구나..
(요즘 잠을 덜 잤나. 다시 누워서 약과같은 잠을 청합니다.)
지금은 늦은 밤, 풀벌레가 울고 선선한 바람이 살짝 열린 창호문 틈으로 불어오는 시간입니다.
오늘 순찰은 비번이라 일찍 잠에 들었었죠.
다시 누워 잠을 청해봅니다.
…자세를 바로 잡아봐도, 영 다시 잠에 들 기분이 들지 않습니다.
마침 날도 선선하니 산책이라도 하는 것이 어떨까요.
한영휘:하.
(연신 뒤척이다가. 잠이 오지 않자 요를 뻥 차버리고 일어선다. 하품하면서 밖으로 나섰다.)
뻥..
모두 잠든 시각이라 드문드문 순찰하는 다른 내금위들을 제외하면 사람이라곤 찾아보기 어렵네요.
무작정 걷다 보면,
저 너머 황후궁 근처 강가에 수상한 인영이 쪼그려 앉아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침입자인가?
❈:관찰력 판정
한영휘: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쪼그려 앉아서 부스럭 부스럭...
하는 짓이 영 수상합니다.
여기 떡하니 침입자가 돌아다니는데, 다른 내금위들은 여기까지 순찰 돌지 않고 뭐 하는 거야?!
한영휘:이 자식. 뭐하는 놈이냐!
수상한 사람은 영휘의 호통에 놀라 홱 돌아봅니다.
정희원:... 깜짝이야.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 낮춰.
한영휘:헉. (입이 떡 벌어진다. 주위 두리번거리고는 몸 낮춰서 붙어왔다.)
마마. 왜 여기 계세요.
정희원:(다시 고개를 돌린다.) 산책. 잠이 안 와서 고양이랑 놀고 있었어. (다가오면 쪼그려 앉은 몸을 움직여 자리를 내어준다.)
황후가 고양이와 놀고 있었습니다.
최근 황후는 잠들었다가도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고,
종일토록 불안해하거나 공식 석상에 나가기를 거절하는 등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였습니다.
그럴 법도 하죠.
이 구중에 갇혀 무시당한 것도 벌써 몇 년, 황후로서 내 명부를 통솔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황제조차 그녀를 무시하며 폭언하기 일쑤죠.
누구라도 쉽게 견디기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한영휘:'나쁜 놈들..' (그리 생각하며 내어진 자리에 슬쩍 들어선다. 고양이를 빤히 바라보고 옆에 쪼그려 앉는다.)
요즘..힘드십니까?
정희원:힘드냐고? ...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드러누운 고양이의 배를 쓰다듬다가) 너도 만져봐, 털이 부드러워.
한영휘:....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다가, 저도 고양이의 배를 살살 만져본다.)
고양이가 그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손길을 받습니다.
정희원:귀엽지? (걱정스레 보는 눈빛에도 아랑곳 않고 웃는다.)
한영휘:네. 귀엽네요.. (웃는 표정에 그제야 안심되는 듯 저도 부드럽게 웃는다.)
닮았어요
정희원:뭐가?
한영휘:마마랑 얘요.
(배 간질간질)
정희원:별로.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다시 웃는다.) 그럼 나도 다음 생엔 고양이로 태어나야겠다.
그나저나 넌 이 밤에 왜 나와있어?
한영휘:고양이로 태어나시면 제가 호강시켜드리겠습니다. 완전 푸짐해져서 못 움직이게요!
아,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나와봤어요.
정희원:푸짐?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고양이 이마를 긁어주며...)
나쁜 꿈을 꿨구나. 나도 요즘 그래. (돌아본다.)
내가 자꾸 누굴 죽여...(분위기 음침해짐...)
한영휘:(음침해진 너를 보고 마음이 찡해진다. 하다하다 그런 꿈까지 꾸시다니. 등을 토닥여준다.)
괜찮아요. 꿈일 뿐이니까..
정희원:...농담이었는데 안 넘어오는구나.
그래, 내가 남은 못 죽이지.
요즘 건강이 너무 악화됐거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이야. (후후... 웃고는 제 옷에 달린 값비싼 노리개를 떼어낸다.)
이거 가질래?
한영휘:(농담이라는 소리에 멍청한 소리를 했다가, 이어지는 말에 안절부절한다.)
몸 소중히 여기십시오..! .. 유품으로 주시는 거면 안 받아요.
선물이면 받을래요.
정희원:그럼 안 줄래. (홱)
진짜 안 받을 거니? 후회하면 어떡하려고?
한영휘:(홱 낚아채는 노리개 잡는다.)
안 죽으면 안 됩니까? ..
몸은 나아질 거에요..
정희원:(노리개 잡는 것 보고) 거봐.
그걸 나한테 부탁한다고 되겠니?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 그냥 느낌이 그렇다할 뿐이야. (자리에서 일어나 물줄기가 흐르는 곳 가까이로 간다.)
한영휘:...(잠시 생각하다가) 저기, 비싸서 받는 거 아닙니다?
그래도 안 죽으려고 마음을 먹는 거랑 다르잖아요. (네가 가는 곳으로 쫄쫄 따라간다.)
정희원:누가 뭐랬니, 내가 좋아서 받은 거잖아?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한영휘:헤헤. 가끔 마마는 이상한 소리 하시니까. 오해 받기 싫어서요.
정희원:내가 언제? (ㅇ.ㅇ)
한영휘:하하.
정희원:웃니?
한영휘:..몸은 나아질 수 있으니까. 의원들이 제대로 안 보면 제가 탕약이라도 지어올게요.
정희원:딴 소리는.
한영휘:큼.
정희원:괜찮단다. 탕약이야 매일 마시고 있으니.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렴. 내가 죽으면 죽는 거고 만약 살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거지.
한영휘:....(잠시 침묵하고) 죽을 사람이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지금 제 눈 앞에 있는 마마만 생각하고 싶어요.
정희원:(고개 기울이며 보다가,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고개 숙인다.) 많이 컸네.
그래, 생각은 자유니까.
한영휘:언제까지 물에 빠진 애가 아니라구요.
마마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정희원:씩씩한 내금위가 되었어. 지금은 이런 강 건너는 것 쯤 무리도 없겠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다고?
후후, 후후후... 그건.
이 황궁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단다. (발걸음을 돌린다.)
한영휘:(네 칭찬에 풀어진 얼굴로 좋아하는 것은 찰나였다. 끝에 이어지는 말에 입을 꾹 다문다.)
.......
황후마마..
정희원:.... 침소로 돌아가야겠어.
(발걸음을 떼고는) 너도 어서 돌아가 자렴.
한영휘:...저! 그래도..
고양이 만질 때는 기분 좋지 않으셨나요?
정희원:(불러세우는 목소리에 돌아보고는)
그게 어쨌다는 거니?
한영휘:완전 조..금씩이라도 행복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서..
제가 만담이라도 알아올 테니까..
가끔만 행복하게 살아주십쇼!
정희원:...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다가 미간을 구기고, 눈살을 찌푸리고, 한쪽 입꼬리만 비죽 올려 질색하듯 비웃는 표정을 하곤 말없이 다시 제 갈길 간다.)
한영휘:'마마는 웃는 표정이 특이하시구나.'
배웅은 안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정희원:영휘야.
내금위 들어올 때 눈치에 대한 시험은 안 치는 거니?
한영휘:네? 네.. 그렇습니다.
정희원:...푸훗, 그래... 그렇게 살으렴. (돌아보지 않은 채로 걷는다.)
침소까지 배웅해 줘.
한영휘:(금방 웃는 얼굴로 네! 대답하고는 천천히 뒤를 따른다.)'그래. 이걸로 된 거야..'
황후를 침소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러면 슬슬 다시 졸음이 밀려옵니다. 돌아가서 잠을 청하면 바로 잠에 들 수 있겠어요.
첫머리부터 폭풍우 치는 밤 비에 젖은 사람이 달려들어와 외치는 희곡을 보면 누구나 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의 성질은 본래 뻔한 것이어서,
벼락이 궁성 그늘을 날카롭게 밝히던 밤,
꼭 무슨 사건이라도 터질 것 같다는 나인들의 수군거림 속에
기어코 그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가장 처음 소식을 접한 내관은 즉시 황제에게로 달려왔고,
시간이 시간인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찬 편전 같은 곳을 혼란에 빠트리지는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붐비는 저녁 만찬장으로 이 소식을 가져왔다고 달라질 것이 있었을까요?
황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책을 읽고 있었고,
영휘는 황제궁 내금위장에게 보고할 내용이 있어 잠시 들른 차였습니다.
황후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바로 어젯밤이었는데요.
갑자기 승하라니요?
이 경악할 소식에 황제는 짧게 탄식했을 뿐입니다.
귀찮은 일을 맞닥뜨린 사람 같은 태도였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황후의 안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 죽는 것은 조금 곤란했기 때문입니다.
영휘가 전부 파악하진 못했어도 황후의 친정에서 끌어 온 자금으로 새로운 일 몇 가지를 벌이려 한다는 소문 역시 이미 퍼진 내용이었고요.
어쨌든, 사람이 죽었다니 어떻게 된 것인지 가서 보기는 해야 할 것입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고, 영휘도 급히 그를 따라 황후궁으로 움직였습니다.
한영휘:,.....개자식..(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불경하고 작게 중얼거린다. 아내가 죽은 사람의 태도인가.)
(누군가 제 머리 위로 종을 떨어뜨린 것 같았다. 차오르는 울컥한 감정을 삼키고 황후궁으로 향한다.)
들어설 때부터 어수선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제국의 안주인이 기거하는 곳이라기엔 수가 적은 궁인들이 저마다 공포에 질려 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황제가 도착하자 모두 황급히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는 가로막는 사람 하나 없이 황후의 침전으로 직행합니다.
영휘도 마음이 급하겠지만 황제보다 앞서갈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 뒤로 그나마 침착한 지밀상궁과 나인들이 따릅니다.
침전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들어서던 황제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립니다. 끔찍한, 아주 끔찍한…….
그 여자, 남국 바다를 그대로 떼어 가둔 유리 온실에서 자라난 듯한 여자,
그 아가씨…….
찐득찐득한 피가 엉겨붙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그것이 도저히 생전의 황후라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팔과 다리는 기이한 각도로 꺾였고, 눈, 코, 입, 귀, 부위를 가리지 않고 온몸의 구멍에서 혈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혼탁한 눈을 홉뜬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역할 정도로 희게 질려 비위가 약한 궁인 몇은 입을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날 지경이었습니다.
목욕 직후에 변이 발생했는지 젖은 머리카락이 정돈되지 않은 채 풀어 헤쳐졌고,
차림새 역시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채 걸치지 못한 저고리가 아무렇게나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이성 판정 1/1D3
한영휘:
SAN Roll
기준치: 60/30/12
굴림: 38
판정결과: 보통 성공
❈:이성 1 감소합니다.
한영휘:( 크게 흡뜬 눈이 닫히지 않았다. 무어라 입을 달싹일 수도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 기나긴 충격 후에.. 겨우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탄식 속에서 황제와 지밀상궁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황제: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냐?
지밀상궁: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목욕하신 직후 앉아서 시중을 받으시다 갑작스레…
갑작스럽게 피를 토하며 쓰러지셨습니다.
어의 영감께서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과연 시체 곁에 시립한 어의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황제가 몇 가지 더 질문했지만 답변으로 미루어 알 만한 단서는 없었습니다.
지밀상궁과 어의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 지밀상궁, 나인 셋, 이렇게 도합 네 명이 황후의 목욕 시중을 들었 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고, 황후는 물에 몸을 담근 채 잠시 잠들었다. 한 시간 정도 목욕을 한 후 침전으로 돌아와 황후가 앉았다.
◆ 황후의 머리카락을 말리기 위해 영건(수건)을 든 순간 갑자기 그가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내관 하나가 급히 어의를 부르러 갔고, 5분도 되지 않아 그가 도착했으나 황후는 이미 절명한 상태였다.
◆ 최근 황후에게 특별한 질병은 없었다.
동석했던 궁인들은 겁에 질려 떨면서도 지밀상궁의 증언이 사실이라고 대답합니다.
황제는 짜증스럽게 침실 안을 한 바퀴 둘러본 후, 새벽동안 철저히 조사하여 진상을 가려내라 명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조는 갑작스럽게 횡액을 당한 반려의 사망을 밝혀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에 가까웠죠.
하늘 앞에서 평생 함께 걸을 것을 맹세한 아내가 비참하게 죽은 사건을 두고 지시할 만한 일은 아니죠.
그녀의 취급이 늘 이랬습니다.
딱히 가지고 싶진 않지만 내버려두기엔 그녀를 둘러싼 배경이 아까운,
그래서 못난 취급을 하며 도망치지 못하도록 가두고 필요할 때에 데려다 쓰기는 해야 하는.
애초에 황제가 그녀를 고른 이유부터가 그러했으니 이제와 놀랄 까닭도 없지요.
황제는 비탄도 없이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났습니다.
한영휘:(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감추려 한 손을 올리고 꽉 쥔다.)
❈:잠시 후 시신을 수습할 어의들과 보조인이 두 명 더 왔고, 지밀상궁은 휘하 사람들의 입단속을 하기 시작합니다.
영휘는 침실을 둘러보며 간단한 면담과 조사를 할 수 있습니다.
한영휘:(이 황궁에서 나가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그 말이 오래도록 귓전을 울렸다.)
(곧장, 그녀의 시신으로 다가간다.)
❈:◆ 황후의 시신
시체에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역한 기분이 느껴집니다.
한영휘: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94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합니다.
시신이기에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굉장히 차갑고 어딘가 무기질적인 느낌을 줍니다.
죽은 사람의 시체라기보단 지독하게 잘 만든 나머지 도리어 불쾌한 도자기 인형 같다는 인상입니다.
흰 침의를 입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덜 말라 젖은 상태입니다.
눈과 코, 귀, 입가에서 모두 피가 흐른 듯합니다. 특히 토해낸 피가 많은지 가슴팍에 검붉게 뭉친 핏덩이가 튄 흔적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눈
눈은 아직도 부릅뜬 상태입니다.
한영휘:(저고리를 위에 조심스럽게 덮어주고, 눈두덩을 천천히 쓸어 감긴다.)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한영휘:...(훌쩍. 조사현장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었으므로 코를 한 번 삼키고는 가슴팍을 자세히 살핀다.)
❈:가슴팍을 자세히 살펴도 알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옆의 어의에게 물어보면 다른 정보들을 더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영휘:(어의에게 눈을 돌린다.) 황후에게 질병은 없었고. 그 밖에 특별한 점도 없었습니까?
어의:이게 무슨 변고인지...
병세가 없었다 하지만, 참 희한한 일일세. 당신은 저런 병을 들어본 적이 있소?
어의인 나조차 들은 바가 없는 일이외다.
저렇게 칠공에서 피를 쏟으실 정도라면, 갑자기 외부에서 큰 충격, 그러니까 공격 같은 것을 받아 내장이 크게 손상되는 급의 상처는 입어야 하오.
멀쩡하시던 분이 갑작스럽게 저렇게 되셨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군.
한영휘:...독극물을 섭취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어의:당장 검사한 바로는 없소. 지금으로서는 쉽게 원인이 무어라 말하기가 어렵소. 어느 의원을 불러다 놓아도 비슷하게 말할 거요. 이거 참...
한영휘:..그렇군요. ..... (한숨을 쉬며 어의 옆의 방석을 바라본다.)
❈:평범한 방석입니다. 특이한 점은 없습니다.
한영휘:(시신 옆의 보석함과 경대도 샅샅히 훑어본다.)
❈:◆ 경대, 보석함
황후가 앉았다 쓰러진 경대입니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워 가구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물건입니다
앉아 있다 피를 토했다는 증언이 사실인지 거울과 서랍 등에도 피가 튀어 있습니다.
그런 사실을 제외한다면 경대 자체에는 크게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경대 위에는 장신구 등이 보이고, 보석함 하나가 열린 채 놓여 있습니다.
한영휘:(열린 보석함을 들여다본다.)
❈:마찬가지로 황후의 반지와 목걸이 등이 담겼습니다.
생각보다 보석의 수가 많지는 않습니다.
이상한 점은 딱히 없군요.
한영휘:....(시체 근처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다, 빙 둘러 탁자와 방석을 살펴보러 간다.)
❈:◆ 탁자와 방석
먹다 남긴 인삼정과 한 접시가 놓인 탁자입니다.
다기는 모두 깨끗이 닦인 상태입니다.
황후가 목욕 전 간식으로 먹던 것이고, 모두 평범한 것입니다.
한영휘:..(먹다 남긴 인삼정을 검시하도록 지시하고는 침상으로 향한다.)
지밀상궁:그 인삼정이 의심스러우신 거라면 걱정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항상 수라와 간식은 몇 차례 기미를 거치지요.
독살이라면 시도가 쉽지 않았을 터입니다.
한영휘:...(물끄러미 지밀상궁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의심 가는 정황을 말씀해주시지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습니다.
지밀상궁:그게... 있으셨다면 바로 말씀드렸을 겁니다. (곤란하게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다.)
늘 앓으시던 두통이나 체기 같은 걸 제외하면 특별한 문제는 없으셨습니다. 잔병치레가 잦으신 것도 문제는 문제지만 그건 만성적인 일이었으니까요.
요 며칠 내내 황후궁에만 계시고, 외출이라고는 규장각이나 사람 없는 누각 정도이니 외상을 입을 일 또한 없으셨습니다.
최근 들어 마음의 병이 깊어지시긴 하였으나... 이것이 관련이 있을까요?
한영휘:...마음의 병이라 하시면?
지밀상궁:큰 소리가 나면 지나치게 놀라시거나… 사람 앞에 나서야 하는 행사를 피하시거나.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수라도 자주 거르시고……. 갑작스럽게 나빠지셨다기보단 쭉 좋지 않으셨던 거지만……
그렇지, 나으리께서도 들은 적 있지 않으십니까?
요즘… 모시는 아랫사람들에게 자꾸 선물 같은 걸 주고 그러셨습니다.
갓 들어온 생각시 아이가 갖기엔 과한 귀품을 내리시거나, 나인들에게 금품을 쥐여 주시거나…….
한영휘:.....
(품 속의 노리개를 꾹 쥐었다.)
지밀상궁:그런 말씀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런 상태로 오래 살지는 못할테지. 언제고 나쁜 일이 생기면 자네들은 좋은 상전께로 옮겨 가도록 하렴. 친정에서 그 정도는 도와주시겠지…….’
이럴 수가. 그때부터 주의를 했어야 했는데...
한영휘:..........
지밀상궁:(잠시 상황을 떠올려보는 듯 생각에 잠긴다.)
아, 그러고 보니...
쓰러지실 당시에는 소인도 혼비백산해서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았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한영휘:(한참 그날 밤에 관한 상념에 빠져있다, 지밀상궁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입니까?
지밀상궁:그러니까 목욕하실 때부터 차근차근 말해 보겠습니다.
저기 있는 인삼정과를 드시다 남기시고, 주무시기 전에 반신욕을 하고 싶으시다 하셔서 물을 준비했습니다.
욕실에는 1시간 반 정도 계셨던 것 같습니다. 원래 길게 목욕하시는 습관이 있으시기도 하옵고….
욕실이라 해도 혼자 들어가시는 건 아니고, 곁에서 소인과 궁인들이 쭉 시중을 들었습니다.
중간에 국화차를 한 잔 드시고 잠이 드셨는데, 손발이 많이 차신 듯해 물을 더 데우고 소인이 주물러 드렸지요.
그러다 시간이 너무 길어지는 듯해 깨워 드려 침전으로 모셨는데… 소인의 기억엔 잠드셨다 깨신 후부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밀상궁:그리고 저기에……. (목이 메는 것을 참았다.)
경대 앞에 앉혀 드리고, 궁인 한 사람이 수건을 가져왔지요.
소인이 직접 머리카락을 말려 드리려고 다가가는데 갑자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에는 너무 놀라서 무엇이 이상한 줄도 몰랐는데,
비명을…… 안 지르셨군요.
숨소리 하나 안 내셨습니다.
한영휘:...........
정말로 이상하군요. 대체 그럴 수가..(괴이할 정도의 증언에 눈을 찌푸린다.)
지밀상궁:그러게나 말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탄식하고는) 한 마디 만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 침상
황후가 평상시 취침하는 침상입니다.
호사스러운 금사가 수놓였고 장정 서넛이 동시에 누워도 될 정도로 넓지만, 전후사정을 아는 사람의 눈에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도 합니다.
사실 궁내부 지원을 제때 받지 못해 침구도 모두 낡은 것이고요.
황후가 눕기도 전에 변을 당했기 때문에 침상 자체에는 그다지 이상한 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요.
한영휘:(힐긋 쓸쓸하게 빈 침대를 바라보곤, 그 옆에서 벽장식을 훑는다.)
❈:◆ 벽장식
황후가 직접 수를 놓은 작품을 걸어 놓은 장식입니다.
한영휘: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4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우측 변에서 작은 구멍 같은 것이 언뜻 손끝에 느껴집니다.
크진 않습니다. 얇은 붓대나 머리 장식 끝부분의 침 따위가 들어갈 정도.
그러나 작품을 떼어 내거나 다른 조치를 취해볼 수는 없습니다.
한영휘:(그림 위로 손을 쓸어본다.)
혹시 이 옆은 무슨 방입니까?
(지밀상궁에게 묻는다.)
지밀상궁:예..? 꽃꽂이나 자수처럼 취미를 즐기실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지요. 관련이 있습니까...?
한영휘:그렇군요. 아닙니다. 참고해두려고요. (고개 끄덕이고는 욕실로 가는 길에 향한다.)
(길 쭈욱 둘러봐)
❈:◆욕실로 가는 길
아직 채 다 식지 않은 미지근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자세히 살펴보아도 특별한 점은 없습니다.
한영휘:(특별한 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서랍장으로 걸어간다.)
❈:◆ 서랍장
장인이 공들여 양감을 새긴 서랍장입니다. 낡고 오래된 것이지만 운치는 있어 보입니다.
첫 번재 서랍을 열어 꼼꼼히 살펴 보면 헝겊에 싸인 은침 하나가 들어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까맣게 긁힌 자국이 났네요.
한영휘:(헝겊을 풀어 은침을 자세히 살핀다.)
❈:긁힌 자국 외에는 별다른 수상한 점 없는 평범한 은침입니다.
한영휘:왜 까맣게 긁혔지?
(뭘로 긁혔는지 유추할 수 있을까?)
❈:지능 판정
한영휘:
지능
기준치: 50/25/10
굴림: 24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어딘가 이 침이 꼭 들어맞는 공간에 계속해서 끼우고 빼낸다면 이런 자국이 생길 수 있을 것 같군요.
침전을 전부 둘러보고 나면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깁니다.
의사들은 1차적인 검사를 마무리했고, 흐느껴 울던 황후궁 일원들 역시 우선은 자리를 정리하려는 뜻을 내비칩니다.
오늘은 우선 돌아가 잠들어야 겠습니다.
한영휘:(침과 벽장식을 번갈아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정리하는 일원들에 맞추어 처소로 돌아간다.)
하아아아아.....
아씨. ..(마지막으로 시체를 한 번 돌아보았다가, 걸어간다.)
돌아갑니다...
하지만 과연 잠이 올까요?
사람이 죽으면 별이 된다지만 이 밤을 수놓은 은하수의 물길 중 어느 줄기에도 그녀처럼 가늘고 깊은 우울로 빛나는 항성은 없습니다.
천덕꾸러기 황후가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이 그저 곤란하고 귀찮은 일인 듯이 새벽의 황궁도 묵묵히 조용하기만 합니다.
당신은 이 기이한 사건이 황제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고 볼 건가요?
한영휘:(그럴 수는 없지.. 기필코 사인과 진실을 밝혀낼 것이다. 소리 없는 눈물 질질 흘리면서 다짐한다.)
이윽고 아침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반짝인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날씨가 좋은 오전이었습니다.
영휘는 평상시처럼 소세하고, 오전 근무를 서기 위해 나섰습니다.
어제 갑작스러운 황후의 승하로 황궁 안이 온통 어수선합니다.
근무지인 황후궁까지 가는 동안 몇 사람인가를 마주칩니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내금위 선배가 당신에게 인사를 하네요.
붙잡아 간밤의 소식을 물을 수 있습니다.
한영휘:아, 안녕하십니까.
간밤은 강녕하셨습니까?
내금위 선배:(마주 인사하고는) 작게 소란이 있었지. 너도 마음이 편치 않았나 보다? (얼굴을 보며...)
황후의 시신은 수습돼서 빈전에 모셔졌다. 피를 토한 것 외에는 상한 부분이 없어서 처리가 쉬웠다지.
한영휘:..모시던 분이었으니까요. (그녀의 취급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그렇습니까. 빈전에....
내금위 선배:그래. 나도 황후의 일이 안타깝다. (안쓰럽게 바라보고는)
황제는 황후의 아버지인 대사공께서 새벽같이 달려와 읍소했음에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더라.
이건 비밀인데... (가까이 가서는 작은 소리로) 심지어 어젯밤에 귀비의 궁에서 머물렀다고 하시지 뭐냐?
한영휘:...(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린다.) ..놀랍지도 않네요.
황제 폐하가 귀비마마를 아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니까요. (공손한 말투였으나, 약간의 비아냥이 섞였다.)
대사공께서는 황실을 계속 지원하신답니까?
내금위 선배:(네 비아냥 섞인 말에 주위의 눈치를 살피더니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그 이야기는 들은 바가 아직 없다.
참, 그리고 국장 말인데, 절차대로 진행한다지. 황제가 상복을 입는 기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그렇게 천시하던 것치고 최소한 황후로서의 예우는 해줄 모양이다.
참, 내가 어의한테도 다녀왔었지. 이것도 궁금하냐?
한영휘:..(추욱 어깨를 늘어뜨린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당연한 일이지만..
뭐라도 말했답니까?
내금위 선배:그래. 음독인지, 중병인지 의원들이 밤을 새서 살폈지만 어느 쪽이라고도 확언할 수 없는 상황인데, 명확히 말하지는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한가지 있지.
황후께서 큰 병을 앓고 있었던 건 아니니, 말을 모아 보면 행간에서 독살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암시가 묻어나는 듯 하다.
문제는 독살일 경우 황제께서 책임소지를 피하기 위해 이 죽음의 진상을 명명백백히 드러낼 의사가 없으리란 것이다.
정확히 어떤 의도로 살해한 것인지 모르니 다음 겨냥이 폐하일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는 진행하겠지만, 결과는 그분의 입맛에 따라 고쳐 발표되겠지.
한영휘:그런...,
내금위 선배:아, 그렇지.
그런데 검시한 의원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지.
뭐라더라, 황후의 가슴에...
바로 이 시점에, 멀리서 사색이 되어 달려온 다른 내금위 동료 하나가 고함을 칩니다.
내금위:상전께서 시체로 발견되셨습니다! 지금 난리가 났어요!
한영휘:?!?
동료는 발을 구르며 그 어마어마한 말을 차마 쏟아내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동쪽을 가리켰습니다.
여기서 동쪽. 황제를 가장 근처에서 모시는 상전내관 이야기입니다.
한영휘:'황후마마에 이어 황제폐하까지?!'
이 나라에서 황제가 앉는 왕좌는 여섯 길 위에 앉은 백금 옥좌라고 불립니다.
정말 백금으로 만들었다는 까닭도 있고,
건국 설화에 여섯 출병길과 관련된 일화가 나오는 고로 황궁에도 여섯 길을 본따 편전으로 다다르는 여섯 갈래 길을 만들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섯 복도가 모이는 앞뜰을 거치면 비로소 근정전이 등장하고, 다시 문을 넘어서야 백금 옥좌에서 천하를 오시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공식적인 행사날 황제를 알현하는 자들은 이곳에서 무기를 맡기고 자세를 가다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백여 년을 내려온 위엄이 산산히 부서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됩니다.
평생 황제를 모셔온 노인이,
그 깐깐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궁전을 호령하던 또다른 우두머리가....
바지가 벗겨진 채 죽어 있었습니다.
무려 황가의 위엄을 상징하는 정전 앞에 목을 매달아 공중에서 덜렁거리는 상전내관의 시체인데도,
허리 아래 사정이란 본래 단두대에 매달린 사형수의 눈마저 돌아가게 하는 성질을 지니는지라,
사람들은 아주 본능적으로 그자의 낡고 주름진 국부를 먼저 바라보게 되고 맙니다.
그 볼품없고 초라한 위용은 황제의 아낌없는 신임을 받는 충신으로서 여느 대신 못지 않은 명예를 자랑하던 남자의 최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작게 쪼그라들어 있었습니다.
사정을 모르고 얼결에 섞여 들어온 여성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지만,
남성들이라고 해서 탄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스울 법도 한 상황인데 전혀 그런 기분이 들지 않았습니다. 이, 역겨운....
한영휘:(단지 거북함만이 느껴진다. 시신을 아래서 위로 훑었다.)
❈:하필 시각이 낮것상 직후였기에 몰려든 사람의 숫자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상황을 살피고 싶은데 이대로 있다간 군중에 파묻히게 생겼군요.
한영휘:
크기
기준치: 60/30/12
굴림: 2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노인의 시신 상태가 굉장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가슴께가 피로 젖어 있네요.
교살당한 시체에 혈흔이 있을 까닭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목 부분이 그다지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꼼꼼히 살피지 않았기에 확실하진 않지만, 목졸려 죽은 시체라면 벗어나고자 격렬히 움직이면서 발생하는 상처 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 시신은 마치... 이미 죽은 시체를 뒤늦게 고리줄에꿰어 놓은 듯한 꼴이 아닌가요?
이때 군중이 급히 갈라집니다.
황제가 도달한 것입니다.
노기에 찬 그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시종장의 시신 앞에 섰습니다.
노인의 비참한 꼴을 보고 주먹을 말아쥔 황제는 분노를 감추지 않으며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황제:반드시 찾아내 엄정히 단죄하리라!!
피를 토하며 죽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다볼 땐 어땠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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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나흘이 지났습니다.
황후의 훙서薨逝로부터 엿새째, 그녀의 죽음까지 살인으로 친다면 6일간 황궁에 연쇄살인이 5건이나 발생했습니다.
황제가 아끼던 내관, 황제가 아끼던 숙수, 황제와 친분이 두텁던 대귀족 모두가 황제와 친밀한 연관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황궁은 스산하리만치 조용하고 모두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특히 공공연히 황제파라고 알려진 권신들은 아예 칭병하고 황궁으로의 발걸음마저 끊었습니다.
국장 기간과 겹쳐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연일 경비를 강화하니
구역을 막론하고 모든 곳이 사람 사는 공간 같지 않게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리고 험흉한 것들이 돌았습니다.
그것은 발이 없으되 평소에는 높으신 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가장 낮은 곳까지 누구보다도 쉬이 건너갈 줄 아는 힘을 지닙니다.
세상에 말보다도 빠른 것은 없기에 평생을 황족의 옷자락 하나 밟아보지 못할 이들까지도 쉬쉬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로 떠나 보내는 이야기가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제와 귀비만은 살아 있습니다.
어째서?
황제는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진 채 황제궁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귀비와 단둘이 심처에 몸을 숨기고 내금위들로 황제궁을 겹겹이 둘러싸
쥐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도록 방비를 단단히 했다지요.
순찰을 지독하게 강화했고, 내금위 업무는 평소보다 배로 늘어났으며 한성부 순라군까지 협조를 시작했습니다.
며칠간 수사를 거듭하면서 사헌부와 내금위에서도 나름대로 알아낸 정보가 있습니다.
❈:◆ 시신은 대체로 '이미 사망한 후' '시체인 상태로' 목이 매달렸습니다.
◆ 범행 장소는 반드시 황제의 위엄과 관련된 공간이었습니다.
◆ 사망한 자들은 전원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 범행 시각, 근처에서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두어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증언은 그다지 신빙성이 없습니다. 첫 번째 항목처럼 시신의 목숨을 깔끔하게 끊고 목까지 매달아 두려면 적어도 건장한 성인 남성 정도는 되어야 할 테니까요.
영휘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곳을 중심으로 순찰을 도는 임무를 배정받게 되었습니다.
❈:지도에서 빨간 점이 찍힌 곳들이 사건 장소입니다.
오늘의 담당 구역은 우측 내의원과 규장각, 두 장소를 방문해볼 수 있습니다.
한영휘:(규장각으로 향한다. 그러고보니 황후마마는 책을 좋아했었지.)
규장각으로 가는 길입니다.
문득 심장을 저미는 듯한 추억이 마음을 두드립니다.
그 노리개를 받던 날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어, 뭔가 본 것 같습니다.
확신할 순 없지만, 모퉁이를 돌아 급히 사라지는 검은 형체 같은 것을요.
저 방향은 규장각으로 꺾는 방향인데요.
한영휘:..!(검은 망토. 급히 규장작으로 달려간다.)
인기척을 쫓아 규장각으로 달려가니, 어느새 인영은 사라지고 난 후입니다.
확실히 본 건 맞을까요?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유감스럽게도 복도엔 개미 한 마리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가 규장각이라면 바로 저쪽에 서고가 있죠. 들어가면 입직한 대교들이라도 있을 거예요.
한영휘:(얼른 서고로 들어가 본다. 목격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대교:(서고 안에서 책을 정리하던 중 눈이 마주친다.)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한영휘:혹시, 이쪽으로 들어온 이를 못 보셨습니까? 지나간 이라던가요.
대교:누가 지나가는 것 같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나이다.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누굴 좇고 계신지요?
한영휘:...누군가 이 쪽으로 들어오는 걸 목격해서요.
대교:그러셨습니까... 내 수상한 인영은 못 보았으나, 어젯밤에 황후 전하를 뵙기는 했나이다.
한영휘:....어젯밤이요?!
대교:(놀라는 목소리에 이어서) 황후 전하께서 돌아가셨다는 건 알다 마다요.
그래서 꿈인가 생신가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잠결에 헛것을 본 거라곤 생각하지만, 꿈결이든 환각이든 어제 뵌 기억은 있지요. 가시는 길도 못 챙겨 드렸으니, 귀신으로라도 한번 더 뵈면 좋겠다고 생각하나이다.
한영휘:...(그래도 희원을 생각하는 이가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는다.)
그러게요. 귀신이라도 좋으니 한 번 나오면 좋을 텐데...
혹시 규장각에서도 죽은 인물이 나왔나요?
대교:기회가 된다면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푸근하게 웃고는)
그랬지요. 지금은 잘 수습되어 다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하였습니다.
그렇지. 황후 전하께서 오래 전에 책 몇 권을 빌려가셨었는데, 그게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황후궁에 출입할 수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걸 좀 전해주실 수 있나이까?
한영휘:알겠습니다. 제가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누가 죽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대교:고맙습니다. 아... 황제 폐하와 친분이 두터우신 대귀족 분이었습니다. 규장각 문틀에 목이 매달려 있었지요.
한영휘:네. 감사합니다. (짧게 목례하고는, 내의원으로 향하려 한다.)
대교:(짧게 인사하고 보내준다.)
내의원으로 이동합니다.
스산한 바람이 뺨을 스칩니다.
시신 자체는 이미 치워졌고, 범행이 벌어진 공간만 보존해둔 터라 특별히 추가로 조사할 것은 없습니다.
근무 목적 자체는 단순한 경계이니 한 바퀴 순찰만 돌아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의원 뒤쪽에서 쑥덕거리는 자들이 눈에 띄네요. 저들은...
황후를 수습한 어의들이군요?
한영휘:
듣기
기준치: 60/30/12
굴림: 49
판정결과: 보통 성공
❈:다음과 같은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어의:그러니까… 잘못 본 거 아니지?
다른 어의:그랬다니까. 가슴을 갈랐는데, 심장에 금강석이 꽂혀 있었다고. 아주 주먹만한 게.
어의:그게 어떻게 거기 박혀 있어? 뭐, 잡수셨거나 하면 위 같은 데에 있을 수는 있어도. 심장을 보석이 찌르고 있다는 게...
다른 어의:수상한 건 그게 전부가 아니야. 왜 있잖은가, 그 후궁전에서 죽은 나인. 그 여자 주변에도 보석 가루 같은 게 있었어.
어의:아, 그 얘기라면 나도 들었다네. 장고고 규장각이고 다 나왔다던데. 녹주석이나 홍옥 같은 게.
한영휘:...?!?
(듣고도 믿기 힘든 얘기였다. 심장에 보석?)
어의들은 인기척을 느끼더니 황급히 흩어집니다.
한영휘:(들켰나...)
보석이라니.. 그래서 보석함에 별 게 없었나?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내의원 주변에는 검은 망토도, 그 외의 수상한 점도 없었습니다.
순찰을 마치면 문득 대교의 부탁이 떠오릅니다.
황후궁에 가 볼까요?
한영휘:(황후궁으로 향한다.)
대교의 부탁을 받아 황후궁으로 돌아가니, 사람이 아무도 없군요?
황후가 사망한 날 석연찮았던 부분이 떠오릅니다.
❈:재조사가 가능합니다.
한영휘:(주위를 둘러보다, 서랍장을 다시 열어본다.)
❈:첫 번재 서랍에 헝겊에 싸인 은침 하나가 들어 있었죠.
한영휘:(헝겊에 싸인 은침을 바라보고, 그 때와 차이점이 있는지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넣어둔 그 상태 그대로 잘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걸 사용한다면...
한영휘:흠....당연히 흉기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뭘로 죽이고 다니는거지? 조금 의아해 하며 침상으로 향한다.)
❈:침대 또한 저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이지만...
한영휘:
관찰력
기준치: 65/32/13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아...뭔가 걸리는데! 보기만 해선 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부 샅샅이 뒤져봅시다.
한영휘:(베개 들어보고 이불 들춰보고 이불보와 베개 안에 뭐 들었는지 털어보고 침대 밑도 보는 중)
❈:아이구 잘해요
침대를 받치고 있던 건 다름이 아닌 궤짝이었습니다. 열쇠구멍이 있네요.
한영휘:(슬 서랍장에서 가져왔던 은침으로 쑤셔본다.)
❈:은침으로 쑤셔보면 손쉽게 열립니다.
안에는 굉장히 기분 나쁜 냄새가 나는 잿가루와 뼈를 태운 듯한 흔적,
복잡하고 불쾌한 수식을 갈겨 쓴 종이 조각,
반쯤 녹은 금강석 조각,
사람 모양을 본딴 천 인형이 있습니다.
이게 다 뭐죠? 왜 황후궁에 이런 게 있나요?
한영휘:..?
뭐. 뭐야 이 삿된 것들은.
(의미를 모를 물건들의 나열에 황당해한다. 더 살필 것이 있나?)
❈:이것들 말고는 더 없는 모양입니다. 있다 해도 이것들 보다 충격적이지는 않겠죠! 도대체 뭘까요...
한영휘:(곰곰) 저주인가..
(어쩐지 소름 돋는 느낌에, 일어나 벽장식으로 향한다.)
❈:황후가 직접 수를 놓은 작품입니다. 가장자리 끝부분이 벽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었죠.
한영휘:(지금은 작품을 걷어볼 수 있나?)
❈:끄트머리를 살짝 걷고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무언가 꽂아 넣을 수 있을 만한 작은 구멍이 보입니다.
한영휘:(슬쩍 은침을 꽂아넣어본다.)
❈:은침을 꽂아 넣으면 뭔가 딱 맞물리는 느낌이 들고, 달칵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됩니다.
문처럼 잡아당겨 열어보는 형식입니다.
한영휘:(어떤 잠금장치지? 침을 꿀꺽 삼키고, 잡아 열어본다.)
❈:액자 금고 안에는 다양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난잡하게 널려 있었습니다.
아주 낡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고, 뭔가 액체로 잔뜩 젖은 듯이 날강날강한 책 서너 권, 문장이 되지 않는 단어들을 마구 흘려 쓴 종이 몇 장, 보석 조각 등이 보입니다.
한영휘:이게 규장각에서 빌린 책들인가?(책 서너권을 펼쳐보다,) 아. 뭐가 묻은 거야. (액체이 정체도 가늠해본다.)
❈:책들은 하나같이 굉장히 불쾌한 느낌을 줍니다. 제목이 쓰여 있지는 않습니다.
액체의 정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다만 유독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훑어볼 경우 오컬트 기능 2 상승, 이성 판정 0/1을 합니다.
한영휘:(쭈욱 책들을 훑어본다.)
SAN Roll
기준치: 58/29/11
굴림: 10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슬쩍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불쾌하고, 소지하는 것을 걸렸다면 당장 치도곤을 당했을 정도로 악독한 지식이 담긴 책입니다.
누군가를 저주해 죽이는 방법, 원석이나 귀금속, 장신구를 이용해 사람에게 깃들었다는 마력을 끌어올리는 방법, 사람을 인신공양해 복잡한 마법진을 만들고 모독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방법... .
한영휘:.....
황후마마? (아득해지는 생각에 혼란한 눈을 한다. 우선은 책들을 챙겨 들고, 마구 무언가 흘려 쓴 종이를 확인한다.)
❈:첫 장엔 몇 가지 복잡한 산수 공식, 그리고 반복해 그린 오각형 모양이 눈에 띕니다.
둘째장은 뭔가를 옮겨 적은 듯한 내용인데, 전부 알아볼 수는 없지만 귀금속을 매개로 추악한 마법을 부리거나 저주 의식을 치르는 법, 사람을 본딴 인형을 만드는 법 등에 관한 글입니다.
한영휘:...
(마지막 글과 시체가 교차되어 떠오른다.)
사람을 본딴 인형? (그것을 펼쳐서 자세히 확인한다.)
❈:무언가의 술식이 간략하게 적혀있습니다. 금강석과 이성 등의 재료를 통해 술자의 모습을 본딴 인형을 만들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다음 장은 다시 오각형 그림, 그리고 넓은 장소에서 오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위치마다 제물을 희생시켜 끔찍한 일을 벌이는 마법진 술식에 대한 번역이 적혀 있습니다.
한영휘:...끔찍한 일? (그 끔찍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적혀져 있나?)
❈:끔찍한 옛 악마가 소환된다는 모양인데, 크게 이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엔 오늘 날짜만이 써있군요.
한영휘:.....?!
(오늘 날짜를 보고 놀란 표정을 한다. 마지막으로, 보석 조각들을 확인한다.)
❈:특별한 점 없는 보석 조각들입니다. 삿된 내용들을 종이에 휘갈긴 누군가가 이 보석들을 사용하기 위해 모아둔 것이었을까요.
한영휘:....(오늘 날짜를 다시 한 번 상기하고, 책들을 챙겨 일어선다. 규장각에 가져다 주기로 한다.)
❈:오늘 날짜라...
오각형의 꼭짓점에 해당하는 위치마다 제물을 올리는 모양이죠.
시간은 어느덧 밤, 더군다나 불안하게도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한영휘:.......폐하. (어쩌면 다시 볼 수 있을까? 실 없는 생각을 했다. 빠르게 규장각으로 향하면서, 주변 건물들을 살펴본다.)
오늘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규장각으로 가는 발걸음이 급합니다.
한영휘:(규장각으로 삿된 책들을 들고 가다 보면,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엄습하는 불안이 퍼뜩 뇌리를 스치면, 황제궁이 있는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급하게 발길을 틉니다.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황제궁으로 향합니다.
불안이 심장을 파먹고 목까지 옥죄는 것 같습니다.
더욱 거세게 비가, 비가 내립니다.
동토를 할퀴는 날씨, 음산하게 번쩍거리며 발걸음을 잡아채는 뇌우...
어디지? 어디로 가야 할까요?
황제궁은 너무 넓습니다. 기이하게 사람이 없습니다.
수많은 근위병들은 다 어디로 갔죠?
동료들은요? 선배들은?
비 내리는 밤에 황제가 있을 법한 곳이라면 어딜까요?
침전?
어디든 생각나는 대로 뛰어가 봅시다.
한영휘:(귀비가 있는 심처에 숨어있지 않을까. 엄습하는 불안과 기이한 풍경들 속에서, 우선은 황제를 찾아 뛰어간다.)
심처까지 뛰어가면,
바로 문 앞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이 들립니다.
당장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비가, 비가 질리도록, 비가.......
한영휘:(바로 문을 옆으로 열어 젖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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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비의 심처입니다.
전부 열어젖힌 창문에서 비가 들이치고 있었습니다.
멀리 황궁을 둘러싼 산으로 낙뢰가 꽂히는 것이 보입니다.
번쩍, 하고 물방울 같은게, 튀는데,
낙뢰를 걸머지고 반쯤 어둠 속에 갇힌 시커먼 인영이 있습니다.
한영휘:.....
아래 쓰러진 남자는 이제 국새도 면류관도 만질 수 없는 어떤 것.
무엇도 더는 그의 영광을 보장하지 아니할 테지요.
심장을 크게 꿰뚫어 꽂힌 칼을 타고 황족의 피가 흐릅니다.
저토록 고결한 것인데도 도무지 가장 천한 자들의 붉음과 다를 바가 없는...
한영휘:(비참하고 하잘 것 없는 죽음 위로 시커먼 인영을 올려본다.)
...이제 만족해?
눈이, 눈이 마주칩니다.
공중에서 불꽃이 튑니다. 상대가 당신을 알아봅니다.
평소처럼 가라앉은 시선이 아니라,
심지를 가져다 대면 당장에라도 발화점을 폭발시킬 것 같은 안광입니다.
음울하지 않은, 진득하지 않은,
차갑지 않은, 황후 같지 않은,
미쳤으되 건강하고 생경하며 살아 날뛰는 격노.
어쩌면 그녀가 너무나 기다렸을 문장, 오로지 이 순간을 위해 죽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할지 모를 문장.
꼿꼿이 편 등허리를 벼락처럼 훑어 내리는 작열감에 몸을 떨면서, 그녀가 말합니다.
찾았구나
정희원:수수께끼를 풀었구나.
눈을 마주치는 행위가 촛불과 촛불을 마주 대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서느런 눈초리에 일순 불티가 튀었습니다.
뜨거운 빛깔로 갈무 리된 성노가 넘실거립니다.
황후는 숨을 죽입니다.
그토록 오래 준비 해온 말인데도 벅차는 마음에 제대로 발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희원:내가 황제를 죽였어.
숫제 속삭이는 어조였습니다.
튀어 오른 불티가 그녀의 안구를 잡아 먹고 혈관을 불사르며 시퍼렇게 몸을 일으켰습니다.
회광반조라도 상관없었습니다.
이 낯설고 자유로운 불의 홍수를 그녀는 몇 년이고 기다려 왔으니까요.
방식도 색채도 달라진 화火가,
희열처럼 여기 터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정희원:만족하느냐고... (그 말을 곱씹으며 웃음을 터트린다.)
응, 너무나도...
한영휘:(살갗에 불티가 마구잡이로 달라붙고, 피부가 양초의 심지처럼 타들어가던 감각을 떠올린다.) .....
(착잡함과 반가운 마음이 뒤섞였다. 네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간 어디 계셨어요.
정희원:(핏방울이 떨어지는 검을 여전히 쥔 채, 네 쪽으로 돌아선다.) 내가 모습을 비추면 재미 없잖니. 유감스럽고 재밌는 소문이 떠돌고 있는데.
나의 혼백이 궁을 저주하고 있다고... 완전한 사실로 만들어 주어야지.
한영휘:...사실이네. 완전히. (시체를 넘어왔다. 이 차분한 낯 아래의 불씨가 뜨거워 데일 것 같았다. 아연함이 엄습했으나, 오래도록 너를 보아온 저로써는..)
감축드립니다.
마마께서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어서..
정희원:(시체를 넘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한발짝 다가간다. 넘쳐흐르던 광분을 막 해방하는 상황에서도 이해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기쁘게 웃는다.) 푸훗, 후, 후후후...
...아... 네가 축하해주어서 정말 기뻐. (그러고는 맨손을 내밀며) 그런데... 아직 할 일이 남았거든.
한영휘:(넘쳐흐르는 네 분노와 기쁨을 오롯히 느낄 수 있다. 그 길을 네가 혼자 걸어왔다는 것이 못내 씁쓸했으나, 마음에 티 한 점 없이 축하해 줄 수 있었다. 네 손을 꼭 잡았다.) ..그래요. 오랫동안 고생하셨잖아요. 황후가 죽고도 심처에 있었던 이 남자 때문에...
왜, 아직도 할 일이 남은 겁니까?
정희원:그래, 파렴치한 황제놈 때문에 답답했지. (과거에 베풀었던 선의가 이렇게 기분 좋게 돌아올 줄이야. 그렇다면 마지막까지도 날 배웅해주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손이 붙잡히면 엄지손가락으로 네 손등을 문지르다가, 쥐고 있던 칼을 맞잡힌 손 사이로 끼워서 쥐여준다.)
주술을 완성하려면 아직 한 단계 남았어. 마지막으로 내 목숨을 바치고 이곳을 완전히 저주할 거란다.
자, 네가 찔러준다면 난 후회 없을 거야.
한영휘:,...?!..(손 사이로 칼이 잡히면, 그 날붙이를 꽉 쥐었다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한다. 곤혹스럽기도, 영문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기도 한 그 낯의 시선은 네 눈동자 위로 오래 머무른다.) ...왜요?
황제를 죽인 걸로 마마의 숙원은 끝마친 거잖아요. 이제 잘 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대체 왜...?
스스로 하직하려 하시는 겁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가...
정희원:왜냐니...?(그런 반응을 하면 저도 따라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 된다.) 아직 저주는 시작되지도 않았단다.
나를 시달리게 하는 게 황제와 그의 측근들 뿐이었을까?
백성들 사이로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소문들은 어떡하고? 나는 이미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악귀에 지나지 않는 걸. 기대에 부응해 주려는 거야.
한영휘:이 황실에서 벗어나야 행복하다는 말씀.. 무슨 의미인지 잘 압니다. 마마. 이 작은 곳의 모든 만물이 당신을 시달리게 해왔다는 걸요.. (형용할 수 없었던 너의 비틀린 표정을 떠올린다. 오랫동안 옆에서 너를 지켜보며,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전부 끝났잖습니까. 마마는 이미 여기서 벗어났어요.
백성들이 무어라 떠들 건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은 이제 없는 사람인데. 나가서 새 삶을 살 기회가.. 이제야 주어진 것 아닙니까.
정희원:(혼란스럽게 두 눈을 번갈아가며 본다.)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다니까. 날 이해한다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칼을 쥐여준 손을 꾹 쥔다.) 난 이 궁에 저주를 내릴 거라고. 이걸 위해서 얼마나 오래 준비를 했는지는 머리로 계산을 못 해보겠니?
네 생명의 은인의... 마지막 부탁을. (잡힌 손에 힘을 주어 제 가슴께로 가져간다.) 거역할 셈이야?
한영휘:이 궁의 전부가 당신을 미워한 건 아니잖아요. 당신을 둘러싼 환경이 힘들었던 거잖아요. 그 원인은 이제 당신 발 아래에 있는데.. (눌러붙은 살덩이를 내려본다.) 왜 의미 없는 짓을 하시려는 겁니까.
삿된 그것을 궁에 불러일으켜, 저주를 불러오고 자신은 죽는다고요.. (네가 쥔 손에 힘을 준다. 떨림이 멎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요. 저는 그렇게 두기 싫습니다.
제 생명을 구해주신 이를 어찌 죽게 두겠습니까?
정희원:왜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데? (성이 나서는 얼굴이 일그러진다. 여전히 손은 제 쪽으로 잡아당기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이제 와서는 누가 나를 좋아하고 미워하는지 상관이 없단다. 사람들이 비명 지르며 고통받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것만으로 나에게 큰 보상이 돼.
내 마음이야. 그렇게 되도록 둬. 생명을 구한 사람에게 보답할 방법이 정말 죽지 않게 두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한영휘:.., 그래요. 마마께 의미가 있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네가 당기는 대로 끌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힘을 주고 있다.) ..다른 건 전부 해 드릴 수 있지만. 당신이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다고요...
당신처럼 아득한 세계를 가진 이를 제가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목숨에는 목숨. 설령 마마께서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저를 구해주신 데에 대한 응보라고 생각하시지요. (네 손을 뿌리치지 않고, 팔을 잡는다.)
정희원:내가 널 살려낸 게 고맙다면 내 뜻을 따르란 말이야. 이런 막돼먹은...! (팔이 붙잡히면 내빼려고 힘을 준다.)
한영휘:(힘을 빼지 않고 그대로 잡고 있는다. 유리 온실에서 자라난 듯한 여자, 이 아가씨..) ..고마워서 잘 해드리려고 했는데요..
제가 해 드리는 것들 다 별로 안 좋아하셨잖아요.
뭘 해보려고 해도.. 여기서 있는 대로 지치셔서, 전 아무것도 못했는데.. 이대로 죽어버리겠다고요. 싫습니다. (네 팔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정희원:...그래, 싫어. 그러니까 직접 친절히 부탁하잖아. 날 찌르라고...!
산다고 해봤자 안 좋았던 게 다시 좋아질 것 같아? 이 이기적인 놈... 지금 뭐 하는 거니? 이거 놔! (버티려고 했으나 비와 피 섞인 축축한 바닥에 발꿈치가 그대로 미끄러져 따라간다.)
한영휘:그래요. 어차피 싫어하셨는데 달라질 게 있겠습니까? 저로써는. 이제 와서 새삼 상처 받을 일도 없다고요. (축축한 바닥에 미끄러지는 네 발꿈치를 보고, 허리를 들어 올려 아예 한 쪽 어깨에 들쳐 매었다.)
발 까집니다. 그러게 억울하시면 좀 좋아해보시지 그러셨어요? (핏물 바닥을 성큼성큼 걸어간다.)
정희원:(들쳐 매어진 채 놓쳐버린 단검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닿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아, 저주를... 저주를...
(저 너머로 사라지는 단검을 보며, 허공에 허우적거리는 팔을 축 늘어트린다.)
최악이야... (분한 듯 입술을 짓씹으며 네 옷자락을 붙잡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커버린 거니?
한영휘:...(옷자락에 잡히는 손이, 그 옛날보다 아득히 작아보인다.) ..아씨가 잘 못 살아서요.
제가 아닌 다른 누구랑도 잘 살지를 못해서..
제가 뭐라도 하고 싶게 만들잖아요.
..괜찮은 삶을 살아주세요. 그 때가 되면 놔 드릴게요. (이토록 증오를 받으면서도 기묘한 안도감과 기쁨을 느끼니, 참 기이한 일이었다. 얼른 이 곳을 빠져나가야지. 빠져나가서 이 사람이 다른 삶을 사는 걸 봐야겠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어나갔다.)
정희원:(한참이나 말 없이 네 옷자락을 붙잡은 채 있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뗀다.)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게, 네 안위에도 좋진 않을 거야. 공범이나 다름 없는 셈이 되는 거라고... 알고는 있는 거니?
한영휘:제가 그걸 신경 쓰는 인간이었으면. 이러고 있진 않았겠죠. ..각오하세요.
앞으로 재미없는 만담이나 들으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할테니까.
정희원:푸훗, 하... 하하하. (어이가 없는지, 방금 농담이 웃겼던 건지. 이어지는 허탈함에 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럼 눈에 띄기 전에 달려.
이제 널 저주해야겠으니까...
한영휘:농담 같으세요? 진심인데.. (묘한 표정으로 웃고는 네 말에 고개 끄덕인다. 큰 보폭으로 걷던 걸음이, 점점 커지고, 달 아래를 달음박질 친다.)
그렇게 해요.
살아있어서 다행이에요..
영휘는 함께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요.
미친 년이 저기 있습니다,
황제께서 붕어하셨습니다,
그 주제 모르는 여자가 결국 사달을 내었어요.
어떤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인간성을 버리기로 합니다.
인륜을 저버린 여자, 광장에 매달아 분시해 마땅할 여자,
귀신에게 홀린 년, 삿되고 추한, 사람도 아닌….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그녀도 꿈꾼 것이 있었습니다.
반려라는 사람과 사랑하는 것도,
모두가 우러르는 황후가 되는 것도 아니었죠.
여기서 죽고자 결심하기 전에,
비천한 목숨으로 가장 악독하고 저주스러운 것을 불러내려 들기 전에,
그리하여 황가에 가장 추한 것들을 전시하려 하기 전에요.
...
가장 귀한 목숨값인 황제를 바쳤으니 이제 오각형이 완성되었습니다.
남은 것은 부름을 요청하는 자의 피, 자 신의 피,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이날이 오면 응당 볼품없는 심장이라도 갈라 바치려 했는데…
여자는 당신의 어깨 위에서 무너지듯 고개를 숙입니다.
별빛으로 반짝이는 보요를 꽂았을 때에도,
제국의 달로써 칭송받던 때에도 가지지 못했던 고귀나 권위를
비로소 가지게 된 악귀가 여기 있습니다.
황후도 사람도 아닌 여자만이 온전히 여기 남아서,
어쩌면 다섯의 목숨을 바치고 황제를 죽여 바로 당신을 얻은 채로.
그러니 떠납시다.
아침이 오기 전에 떠나요!
달음박질 치는 발걸음이 빗소리에 파묻힙니다.
당신과 여자는 함께, 새벽을 사르는 여명을 향해...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이 여자는 돌아 버렸고,
함께 도망쳐 버린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돌아갈 수 없습니다.
완전히 붙잡힌 신세니까요.
마차를 부를 것입니다.
황후의 문장도 황제의 휘장도 달지 않은 짐마차를 탄 채 광증 어린 자유의 세상으로 갈 겁니다.
그렇게 되고 말 겁니다.
한영휘:바다가 좋아요 산이 좋아요??
정희원:(마차의 창 너머를 보며) ...바다가 좋겠어.
숨을 크게 들이킵니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아침의 첫 공기가 폐를 감쌉니다.
들키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지 없을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도망치면서 누굴 또 죽이게 될지 모르죠.
그렇다고 해도...
여자가 한 손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남의 피가 섞여 분홍색으로 굴러 떨어지는 눈물을 눌러 훔칩니다.
끝내 아쉬워서였을까요, 아니면 그래도 해방되었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었을까요.
그리하여 이곳에, 도덕도 양심도 왕관도 전부 저버린,
사람조차 아닌 그저 둘이 서 있게 됩니다... .
성벽 너머 치열한 온도, 호쾌하게 들판을 달려 나가는 말발굽 소리,
가질 수도 없고 욕심내서도 안 되었을 일들을 덜고 나면 남는 것은 백합 한 송이뿐.
숨막히게 아름다운 그 아가씨.
그러니 당신도 고민해 보자, 왜 내게는 한 줌 봉오리만이 쥐어졌을까?
나의 반려는 세상을 열었다는 신화 속 영웅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모두가 장차 한몫은 해내야 한다는 서사를 부여받으며 태어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