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드 나인에 어서 오세요
2023-03-18
별 세 개 레스토랑 〈클라우드 나인〉에는 특이한 룰이 있습니다. 매해 9월 9일, 한 명의 손님을 초대해 헤드 셰프― 정희원이 직접 단독 디너 코스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억만금을 내더라도 9일의 손님으로 초대받지 못하면 절대 맛볼 수 없습니다. 손님을 고르는 기준을 두고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실종자를 찾습니다.〉
“벌써 6년이 다 돼 가요. 시간이 참 야속하죠?”
“아, 그분. 제가 알기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줄리오의 장례식이 결정됐다네.”
우연히, 9일의 손님들 사이 단 하나의 공통점을 눈치챘다면.
〈실종자를 찾습니다.〉
“벌써 6년이 다 돼 가요. 시간이 참 야속하죠?”
“아, 그분. 제가 알기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줄리오의 장례식이 결정됐다네.”
우연히, 9일의 손님들 사이 단 하나의 공통점을 눈치챘다면.
감독: 정희원
출연: 연은제

굴림: | 45 |
....

그래도 반올림하면 반타작이에요~




-
“곧 9월 9일이네.”
“와, 그럼 우리 진짜 ‘그’ 로제타를 만나는 거예요?”
“난 전에 몇 번 봤지. 디너 먹으러 온 적 있었거든.”
지옥 같던 런치의 라스트 오더가 드디어 끝난 브레이크 타임, 산처럼 쌓인 설거지와 씨름하던 은제는 문득 손을 멈춥니다.
디저트 키친을 맡은 젬마와 수 셰프 제레미의 대화가 들린 탓입니다.
9월 9일. 〈클라우드 나인〉의 연례 행사인 그날은 요일과 상관없이 무조건 디너 타임을 비워 둡니다.
그리고 ‘9일의 손님’이라고 불리는 단 한 명을 위해 헤드 셰프가 직접 주방에 서는 전통이 있습니다.
패스에서 진두지휘를 맡는 희원이 조리대 앞에 서다니.
흔한 일은 아닌지라 다들 이맘때면 호기심을 감추지 못합니다.
...
그러나 은제는 호기심이 아니라 찜찜함을 감춰야 할 판입니다.
〈실종자를 찾습니다.〉
“벌써 6년이 다 돼 가요. 시간이 참 야속하죠?”
“아, 그분. 제가 알기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줄리오의 장례식이 결정됐다네.”
우연히, 9일의 손님들 사이 공통점을 눈치챈 것 같거든요.
사건의 발단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달 전 새벽. 바다를 낀 이 도시는 희끄무레한 시간에도 체온과 비슷한 기온을 유지합니다.
비가 올 기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건조한 공기를 한 움큼 들이켜면 바다 냄새가 밀려듭니다.
수평선 너머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태양은 세상을 태울 듯 이글거립니다.

헤드 셰프와 수산 시장에 들러 식자재를 살피는 날이라 평소보다 출근이 이릅니다.

약속 장소까지로는 어떻게 가나요?


그러고보니 은제는 입사하고 1년 간 어떤 메뉴를 주로 담당했죠?
콜드 키친: 샐러드, 드레싱, 웰컴 푸드 등 불을 거의 다루지 않는 메뉴 담당.
핫 키친: 파스타, 프라이, 소스, 그릴 등 불을 다루는 메뉴 담당.
디저트 키친: 디저트, 제빵, 식후 커피나 차 담당.
아

은제는 신입이니까요~ 응응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바람결에서 은은한 소금향이 납니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준치: | 70/35/14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담벼락, 가로등에 드문드문 실종자, 범죄자를 찾는 전단이 붙어 있습니다.
종이 위에 잉크로 그린 인상 사이 익숙한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전단에 실린 익숙한 얼굴을 발견합니다.
쉰 줄로 보이는 남성. 애꾸눈과 거친 수염으로 뒤덮인 험악한 인상의…….
실종자보단 용의자 같은 사람.
딱히 아는 사람은 아닌데도 눈에 익습니다.
전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진 속 모자에 수놓아진 닻 문양을 보자 떠오르는 기억이 있습니다.
“배를 오래 타셨군요.”
“그럼. 한평생을 전부 바다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바다 괴물도 만나보셨습니까?”
“다들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비웃지만, 나는 언제나 ‘그렇다’라고 대답한다네.”
아마도…… 작년 9일의 손님이었을 겁니다.
하루 내 맞이하는 손님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9일의 손님은 몇 명 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은제가 〈클라우드 나인〉에 온 해 처음 보았던 9일의 손님이었고요.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건강하기 짝이 없던 손님이었습니다.
희원이 어찌나 진지하게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묻던지 마감 시간이 될 때까지 이야기판이 끝없이 벌어졌습니다.
와인을 따라주며 술맛은 어떻냐 묻는 희원에게 “좋은 술이군. 하지만 배에서 먹는 럼주는 못 따라와. 다음엔 내 배에 초대해주지.” 라면서,
“거, 신입도 오라고. 생선 보는 법은 내가 여기 셰프보다 한 수 위라고 자부하거든!”
은제에게도 권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런데 실종이라니.
실종자를 찾는 전단에 실리기엔 어색한 인물입니다.
위압적이기 짝이 없는 덩치와 세월을 견딘 강건함. 납치도 실종도 어울리지 않는걸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갔다가 거대한 풍랑을 만났다면 모를까.
전단을 다 읽을 때쯤 벨이 울립니다.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라면……

희원입니다. zz
불행히도 헤드 셰프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이 잡음은 뭐니? 자전거?


뚝..
약속 장소로 향하면 시장 어귀에서 기다리는 희원이 보입니다.

요즘에는 새벽마다 신선한 재료가 주방에 바로 배달되는데, 뭐하러 발품을 파는 건지.




(연어 두 마리의 꼬리를 잡고 들어올린다.)
봐, 어느 쪽이 더 좋은지 알겠어?
육안으로 보기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아직 제철이라기엔 이르지만, 색깔이 선명하니 둘 다 좋은 품질 같은데…….


기준치: | 60/30/12 |
굴림: | 68 |
판정결과: | 실패 |
제가 생선쪽은 잘 몰라서..


업체에서 납품해준다고 해서 손 놓고 있으면 안 되지. (내려놓는다.) 정답은 오른쪽이야.
보는 눈을 길러, 은제 씨. (잔소리..)


그래... 런치나 디너 타임 빼면 남는 게 시간이니까.
런치나 디너 타임 빼면... ...
(가게에서 마중나오는 상인 보고는) 아, 안녕하세요.
March 16, 2023 10:40PM상인:어이구, 셰프 왔는가.

March 16, 2023 10:41PM상인:좋다마다. 근데 이미 더 좋은 것들은 다 쓸어 갔어.


March 16, 2023 10:41PM상인:그러게 일찍 일찍 다니라고 늘 말하잖아. 거 부지런하게 생긴 양반이.



시장은 원래 해가 뜨지도 않은 새벽부터 여니까...
시장의 아침은 훨씬 일찍 시작됩니다.
해가 채 뜨기 전, 어둑할 때부터 시작한 경매는 동이 틀 때면 슬슬 피크를 지나 좋은 물건은 동이 나고 맙니다.
희원과 은제의 약속 시간이 좀 느슨한 편이긴 했죠.
상인의 아쉬운 소리에도 희원은 웃어넘길 뿐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농담과 함께...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배를 눌러 봐야지. 신선한 생선은 표면을 눌렀을 때 통 튕겨나오는 탄력이 있어.




아니었으면 왜 내가 데리고 있겠어. (후후...)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뱃고동 소리가 들립니다.
수산 시장 바깥으로 배가 드나드는 것이 보입니다.
배, 뱃사람, 닻 그리고 각기 다른 선장 모자.
현듯 실종자 토마소를 상기시키는 조합입니다.
희원은 그의 실종 사실을 알고 있을까요?




실종되셨구나, 몰랐어.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걱정 어린 투)


(말을 돌린다.) 오늘은 전갱이 물이 별로네.


기준치: | 50/25/10 |
굴림: | 71 |
판정결과: | 실패 |


전갱이는 그럼 오늘은 패스할까요?

기분탓이겠죠...
특별히 이상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은 새벽이었습니다.
-
그로부터 일주일 후. 8월의 문턱.
피부를 콕콕 찌르는 바늘 끝처럼 따가운 햇볕이 극성인 여름입니다.
은제는 런치 타임에 정신없이 시달리고 있습니다.
“1번 테이블, 아쿠아 파짜 둘, 7분!”
“네, 셰프!”
“6번 테이블, 올리베 알 아스콜라나 하나, 브루스케타 셋, 5분!”
“올리베 하나, 부르스케타 셋, 5분이면 충분합니다!”
“4번 테이블 식사 끝나갑니다. 세미프레도 준비해 주세요!”
“체리 절임 모자라잖아! 또 누가 주워 먹은 거야?"
March 16, 2023 11:00PM디저트 셰프 젬마:연은제, 여분 꺼내와!
젬마가 비명처럼 은제를 부릅니다.
가뜩이나 더운데 주방은 불씨가 꺼지질 않습니다.
온갖 식자재를 굽고 찌고 튀기느라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그 꼴로 버럭버럭 소리까지 질러대니 딱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보입니다.
체리 절임을 찾아 창고로 뛰어 들어가면 서늘한 공기가 뺨을 식힙니다.
나무 선반에는 차곡차곡, 올리브 절임부터 밀가루 포대, 각종 말린 과일과 고기까지.
실온에서 보관 가능한 식자재는 한가득 준비되어 있습니다.
체리, 체리 절임이 어디 있더라…….
주위를 둘러보는데,


기준치: | 60/30/12 |
굴림: | 71 |
판정결과: | 실패 |
창틀 너머로 손님들의 목소리가 새어듭니다.
누군가 이 아래에서 대화 중인 모양입니다.


“벌써 6년이 다 돼 가요. 시간 참 야속하죠?”
“그래. 그때는 자식을 잃고 어떻게 사나 했는데, 죽으란 법은 없더구나.”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님.”
“우리 애가 여기 요리를 참 좋아했는데……. 9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모습이 생생해.”
“어떻게 잊겠어요. 마지막으로 본 웃는 얼굴이었는걸요.”



꼭 달에 한 번씩은 찾는 단골손님이라서 은제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만큼 나이가 많은 손님은 드무니까요.
헤드 셰프도 꼭 직접 배웅하던 손님들이었는데…….



기준치: | 70/35/14 |
굴림: | 3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사인에 대해선 두 사람 다 이야기를 피하지만, 시기상 결혼식을 치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쁜 일을 겪은 모양입니다.
또다시 손님의 불행한 결말을 확인하고 말았네요.
“체리!!!!!!!!”
곧바로 젬마의 사나운 목소리가 창고를 흔듭니다.
주방에서는 미적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84 |
판정결과: | 실패 |

행운 판정!!

기준치: | 45/22/9 |
굴림: | 63 |
판정결과: | 실패 |
(오늘은 조용하게 지나가진 못하겠네..)

참다못한 젬마가 창고에 쳐들어옵니다.
March 16, 2023 11:08PM디저트 셰프 젬마:넌 체리를 수확하러 갔니?!
젤라토 다 녹잖아! 이건 세미프레도가 아냐, 그냥 녹다 만 체리 주빌레라고!
뒤이어 제레미도 소리를 지릅니다.
March 16, 2023 11:09PM수 셰프 제레미:은제! 수프 두 번 저으라고 했잖아! 그냥 두면 눌어붙는다고!
레스토랑 내부에는 고풍스러운 G선상의 아리아가 흘러가는데,
주방의 풍경은 왜 이토록 난장판인 걸까요…….
희원은 패스에서 음식을 검수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입니다.
March 16, 2023 11:10PM디저트 셰프 젬마:비켜, 내가 찾을테니까!
그때, 콜드 키친의 알레시가 은제에게 그릇을 넘깁니다.
March 16, 2023 11:10PM콜드 셰프 알레시:헤드 셰프 갖다 드려!

일정한 두께로 썬 바게트를 다진 마늘과 올리브유에 버무려 바싹 굽곤 허브와 소금으로 밑간한 베이스.
소금, 후추, 레몬즙, 발사믹 식초와 또 빠지지 않는 올리브유를 바질, 붉은 양파, 오이 한 줌씩과 토마토 콩카세 세 줌에 쏟아부은 토핑.
붉은 살점을 올린 브루게스타는 겉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합니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68 |
판정결과: | 실패 |


바로 음식을 가져다주면...

희원이 곧바로 쓰레기통에 음식을 쏟아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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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이런 음식을 먹고 싶겠어?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은제 씨가 만들었니?


알레시가 만들었지? 꼭 이렇게 망조를 들게 한다니까. 손님은 오매불망 기다리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가 보렴.
안구 잘 닦고 다니고.

알레시 쪽으로 가면 알레시도 마구 소리를 지릅니다.
March 16, 2023 11:23PM콜드 셰프 알레시:뭘 하느라 미적거려!

March 16, 2023 11:23PM콜드 셰프 알레시:아..젠장! 티가 난단 말이지?
고작 5분밖에 안 됐단 말이야.
투덜대면서도 다시 요리하기 시작합니다.

한 명만 먹고 나머지는 숟가락만 빨라는 모양이지?
알레시가 허겁지겁 새 바게트를 데우기 시작합니다.
March 16, 2023 11:25PM수 셰프 제레미:은제 씨!
상황이 일단락되면 수 셰프 제레미가 연어와 양고기와 관자가 든 팬 세 종류를 동시에 휘두르며 손짓합니다.

무슨 일이시죠.(후다닥 가봄)
절절 끓는 통에는 링귀네, 리가또니, 가르가넬리……. 종류가 전부 다른 파스타가 삶아지고 있습니다.
손질만 끝난 새우도 올라와 있습니다.
뭘 도와달란 건지 말은 안 하고 불러대기만 하지만...
이럴 때 신입에게 필요한 건 눈치입니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70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50/25/10 |
굴림: | 92 |
판정결과: | 실패 |



한번만 더 굴려봅시다

기준치: | 50/25/10 |
굴림: | 4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파스타는 면의 종류마다 익는 시간이 다릅니다.
하나하나 익는 시점이 다르단 뜻입니다.
수증기가 확 일자 뜨끈한 물 냄새와 익어가는 곡물 냄새가 느껴집니다.
익는 타이밍을 맞춰 건져야 합니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직감적으로 체를 건져야 할 때를 깨닫습니다.
곡물이 딱 알맞게 익었을 때만 맡을 수 있는 구수한 단내가 신호입니다.
관자를 올린 오일 파스타, 붉은 새우와 게살을 버무린 포모도로 파스타…….
별다른 지적 없이 접시가 패스를 통과했다면 성공입니다.

기름이 튀고 팬은 타고 칼이 도마를 탕 치고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지중해풍 이탈리아 코스 요리의 탄생 과정은 원래 거칠고 폭력적인 겁니다.
모두의 데시벨이 몇 칸은 더 올라간 후에야 간신히 라스트 오더가 끝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매니저가 인사를 건네고 떠나면 셰프들은 각각 바닥에 주저앉거나 조리대에 허리를 기댑니다.
숨 막힐듯한 열기 속에서 은제도 겨우 한숨 돌립니다.
오후 4시까지 한 입도 못 먹은 터라 주린 배가 욱신거릴 지경입니다.
March 16, 2023 11:31PM수 셰프 제레미:아, 배고프다. 오늘 진짜 유난히 지랄이네.

March 16, 2023 11:32PM콜드 셰프 알레시:수 셰프. 맛있는 거 해주세요.
March 16, 2023 11:32PM수 셰프 제레미:팬 거들떠보기도 싫어. 네가 해라.
March 16, 2023 11:32PM콜드 셰프 알레시:저도 지긋지긋하거든요.
March 16, 2023 11:32PM디저트 셰프 젬마:아, 배고픈데~
스태프 밀을 서로 미루던 셰프들이 은제를 쳐다봅니다.
은근슬쩍 웃는 꼴이……

March 16, 2023 11:33PM수 셰프 제레미:(킬킬킬.) 막내야.
뭐 좀 만들어 봐라.
재수 없는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고...

(앞치마를 다시 두르고 팬을 챙겨 불 앞에서며)
번지르르한 코스 요리를 내놓는 직업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점심도 저녁도 제때 챙겨 먹는 법이 없습니다.
냉장고랑 창고에 남은 식자재들로 알아서 때워야 하는 신세가 처량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리 판정 합시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2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흠..(라따뚜이 갑니다)
라따뚜이~!
그릇에 담아 때늦은 점심을 내놓자, 수 셰프 제레미는 생각보다 맛있다며 호들갑을 떱니다.
디저트 셰프 젬마는 배고픈데 뭔들 맛이 없겠냐면서도 그릇을 싹싹 비우고,
콜드 셰프 알레시는 감칠맛이 모자라니 양파를 좀 더 오래 볶으라고 조언합니다.
셰프들과 식사하노라면, 헤드 셰프는 매니저와 레스토랑 운영에 관해 상의 중인지 카운터에 한참 서 있습니다.
식사는 셰프들과 함께 합니다. 다들 말이 많은 편이라 대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March 16, 2023 11:37PM디저트 셰프 젬마:뭔데?

March 16, 2023 11:40PM수 셰프 제레미:9일의 손님? 아, 잘 기억 안나지만 알지. 그 때 당시 결혼식 앞두고 있던 새신부였어.
손님 이야기는 갑자기 왜?

March 16, 2023 11:43PM수 셰프 제레미:웬 일이래. 나야 만나본 적도 없지만 궁금하네. 정작 본인은 안 오고?

March 16, 2023 11:46PM콜드 셰프 알레시:(한창 옆의 젬마와 이야기하다가 무언가 아는 듯 고개를 돌린다.)
새신부? 라리사 씨 말하는 거야?
March 16, 2023 11:46PM수 셰프 제레미:어, 어! 분명 그런 이름이었지!
March 16, 2023 11:46PM콜드 셰프 알레시:라리사 씨는 왜? (팔자 눈썹이 된다.)

아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March 16, 2023 11:47PM콜드 셰프 알레시:라리사 씨는 잘 알지. 장례식에도 다녀왔어.
(슬퍼하는 눈썹이다...) 시체도 못 찾아서 텅 빈 관으로 장례를 치른 탓에 더 눈물바다였지. 어휴...
드물게 보기 좋은 커플이었는데 참 안타까워. 10년 넘게 만나고도 열렬하기 쉽지 않아. 서로 눈만 마주쳐도 웃던데.

March 16, 2023 11:50PM콜드 셰프 알레시:바다인가 계곡인가 빠졌대. 그런데 못 찾은 거지!

(그러고보니 토마소씨도...)
...그렇군요. 안타깝네요. \
March 16, 2023 11:51PM콜드 셰프 알레시:잘은 몰라. (작게 한숨쉬고...)
아쉽게 떠난 목숨을 잠깐 추모하고, 젬마는 괜스레 넉살을 떱니다.
March 16, 2023 11:51PM디저트 셰프 젬마:난 2년만 지나도 남자친구 얼굴이 꼴도 보기 싫던데 말이에요.
March 16, 2023 11:51PM콜드 셰프 알레시:네가 그러니까 결혼을 못 하는 거다.
March 16, 2023 11:51PM수 셰프 제레미:난 헤드 셰프랑 15년째다......
시시콜콜한 대답을 늘어놓습니다.

헤드 셰프랑 15년째요?
(콜록.)
March 16, 2023 11:52PM수 셰프 제레미:그래, 같이 일한 시간 말이야.

March 16, 2023 11:52PM수 셰프 제레미:왜이래?

March 16, 2023 11:52PM수 셰프 제레미:하느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March 16, 2023 11:53PM수 셰프 제레미:그럴 바에 혀 깨물고 죽지.
많이 아는 건 없어. 워낙 자기 얘기를 안 해.

March 16, 2023 11:54PM수 셰프 제레미:그건 클라우드 나인 전통이야. 한 백년 가까이 됐나?

March 16, 2023 11:56PM수 셰프 제레미:뭐냐 이 반응은?

March 16, 2023 11:57PM수 셰프 제레미:그건 나도 모르지~... (어깨를 으쓱인다.)
얼추 배도 채웠겠다, 달콤한 휴식 시간입니다.
안대를 끼거나 베개, 담요를 챙겨선 자기만의 쉼터로 삼삼오오 흩어집니다.
-
3주 후, 8월도 얼마 남지 않은 29일. 런치 타임을 끝내고 주방 청소가 한창입니다.
수 셰프는 입만 살아선 패스를 퉁퉁 쳐댑니다.
March 18, 2023 8:10PM수 셰프 제레미:자기 저녁을 바닥에 두고 먹을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반짝반짝해야지!
주방이 더러우면 그 레스토랑은 1년 안에 망한다.
냉장고와 주방은 첫째도 청결, 둘째도 청결. 가슴에 새기도록.
어허, 연은제. 거기 얼룩이 남아 있잖아.

근력 판정 과 손놀림 판정 해봅시다!

기준치: | 55/27/11 |
굴림: | 87 |
판정결과: | 실패 |


기준치: | 10/5/2 |
굴림: | 7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March 18, 2023 8:12PM수 셰프 제레미:거기 다시 닦아라~!!! (불호령!!)

잔소리꾼이 몇명인지...
청소를 마치면 수 셰프가 잎채소를 한가득 담아 내밉니다.
March 18, 2023 8:13PM수 셰프 제레미:디너 타임 샐러드로 올릴 거니까, 미리 다듬고 씻어 놔.
상태 안 좋은 건 빼두고. 이제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그때, 희원이 끼어듭니다.



March 18, 2023 8:16PM수 셰프 제레미:나도 내 할일이 있어서 분량 보고 시키는 건데... (이하 투덜문)



March 18, 2023 8:19PM수 셰프 제레미:(쿠궁..)

수 셰프가 투정하건 말건 희원은 은제를 주방에서 빼냅니다.
〈클라우드 나인〉의 로고가 선명하게 찍힌 새하얀 편지 봉투가 손안에 들어옵니다.
올해, 9일의 손님을 위한 초대장입니다. 〈카타니아의 로제타에게.〉


기준치: | 70/35/14 |
굴림: | 88 |
판정결과: | 실패 |
..로제타?
카타니아의 로제타? 로제타라고 하면, 여배우밖엔 생각나는 게 없는데…….
March 18, 2023 8:21PM디저트 셰프 젬마:로제타라고?
셰프들은 정말로 ‘그’ 로제타냐며 잔뜩 들떠 몇 번이고 되묻습니다.
희원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입니다.
아니, 오히려 달가운 기색을 찾을 수 없어 의아할 따름입니다.
9일의 손님은 언제나 헤드 셰프가 손수 고르는데.
아무도 강요한 적 없고 억지를 부린 적도 없는데.
심지어 전국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유명한 배우를 초대하면서.
왜 이렇게 미적지근한 태도인 걸까요?
평소라면 원래 그런 사람이지, 하고 넘어갔을 텐데 덩달아 별거 아닌 반응도 눈에 밟힙니다.
...
우체국에 들르면, 접수원 레오가 초대장을 살피곤 살갑게 말을 겁니다.

사교성이 좋아 손님들하고도 툭 하면 수다를 떱니다.
은제도 어느샌가 레오가 어느 스트리트쯤 사는지, 어디 출신인지, 어쩌다 우체국 접수원이 되었고, 어릴 적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대충 알게 되었죠.
March 18, 2023 8:23PM레오:9일의 손님이 정해졌나 봐요. (봉투를 확인한다.)
아~ 전 올해도 당첨되지 못했네요.
아쉬워라, 매해 제일 먼저 알게 되는 건 좋지만…… 그래서 좀 더 일찍 실망하게 되는 건 별로예요.

March 18, 2023 8:24PM레오:정말요? 말로 한다고 되는 거예요?! (+ㅁ+)
그래주시면 고맙겠어요. 매해 엄청 부러워만 하고 있거든요. 제 월급으론 엄두가 안 나고…. (꿀꺽.)
아! 맞아, 아깝게 당첨 안 된 적도 있었어요!
다섯 해 전에 옆 옆집 사람이 초대받은 거 있죠? 한 달 동안 두 칸만 옆에서 살 걸, 후회했다니까요. 물론 주소로 정해지는 건 아니겠지마는...

March 18, 2023 8:27PM레오:아... (아쉬움 섞인 얼굴) 괜찮아요!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어디에요.
아, 전에 짧게 뉴스에도 나온 분이셨는데.... 닥터 아다모 씨요.
국경 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아주 오래 해외 의료 봉사를 다니셨대요. 분쟁 지역이나 재난 피해국에도 다니셨다 그러더라고요.
제 옆 옆집인 겨자색 지붕에 사세요! 거기 그런 분이 살고 계셨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뭐예요.
어휴. 분쟁 지역이라니, 그런 델 어떻게 가나 몰라. 상상만 해도 무서운데. 대단하지 않아요?

March 18, 2023 8:30PM레오:글쎄요. 그건 모르죠! 아무래도 하는 일이 일이시다 보니, 한 마디 섞어보기는 커녕 마주친 적도 없거든요. (어깨 으쓱이고 도장 쾅 찍어준다.)
편지를 접수하고, 도장을 쾅 찍어준 레오가 조심히 돌아가라며 손 인사를 건넵니다.
우체국을 나오면 한적한 오후의 거리가 펼쳐집니다.
유아차를 끌고 걷는 부부와 공을 들고 달려가는 아이들, 지팡이로 박자를 맞추며 걷는 노인…….
특별하지 않아서 소중한 풍경을 시야에 담고 있으면 요 근처의 주택가가 눈에 들어옵니다.
레오에게 들었던, 출퇴근길에 레오와 종종 마주치던 골목입니다.


주택가의 겨자색 지붕은 딱 하나입니다.
벨을 누르고 우편함의 편지를 힐끔 살피면 수신인의 이름은 닥터 아다모가 아니라 니베이입니다.
이사라도 간 걸까? 생각해보는데, 안에서 젊은 사람이 나옵니다.
키가 훤칠하고 자세가 반듯한 그 사람은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가까워지면 빛을 받아 오묘한 색채를 띤 유백색 귀걸이가 보입니다.

그러나 누구인지 깨닫기도 전에 상대가 먼저 은제에게 묻습니다.


네, 지금은 제가 살고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혹시나는 이번에도 역시나가 됩니다.
9일의 손님으로 초대받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여태 살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공통점은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오싹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 모든 일을 한낱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요?


기준치: | 70/35/14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클라우드 나인〉에서 일하시는 것 같군요.
유니폼 카라에 적힌 로고를 알아본 것 같습니다.


유명하던데, 정말로 그렇게 솜씨가 뛰어납니까?
헤드 셰프 이름이…… 뭐였더라. 그러니까, 정희원?
출신도 전공도 불분명한데 평이 좋은 게 신기해서요. 파인 다이닝 정도면 셰프의 경력도 중요하잖습니까.
은제 씨가 보기엔 어떤가요.
……그러고 보니 은제도 희원에 관해 아는 게 많지 않습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다든가, 어느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든가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요.
15년이나 같이 일했다던 수 셰프도 과거에 대해선 어깨만 으쓱였습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91 |
판정결과: | 실패 |
(허참..)


기준치: | 70/35/14 |
굴림: | 9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뭐하는거냐?)


의문은 갑자기 내리치는 벼락처럼 찾아옵니다.
수 셰프가 헤드 셰프 아래에서 일한 지 15년이나 됐다고?
수 셰프의 나이가 벌써 40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에 반해, 오히려 희원은 청년에 가까운 외향입니다.
“나도 처음엔 나보다 어린 녀석 밑에서 일할 생각 없었어. 요리 실력을 인정했으니까 헤드 셰프로 모시기로 한 거지.”
학생이거나 갓 성인이거나 할 적에 이미 헤드 셰프...? 가능한 일일까요?

은제가 찜찜함을 느끼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건 상대는 개의치 않고, 더 묻지도 않습니다.


떠나려는 기미를 알아채면 뜬금없는 질문이 던져집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1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너 왜그러니?)
저녁이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뜬금없이? 이상하다 못해 수상할 지경입니다.
본인도 숨길 생각일랑 없어 보입니다.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저녁 손님들을 모두 허탕 치게 할 생각이 아니라면 약속에 덥석 응할 수 있을 리 없습니다.


쥘 르나르가 말하길,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변명하지 않고 저녁 식사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더군요.
다음에 뵙길 고대하겠습니다.
그렇게 니베이는 인사를 마치고 돌아갑니다.
문득 그에게서 느낀 기시감을 깨닫습니다.
어딘가 희원과 분위기가 비슷하다고…….
이목구비가 닮았냐면 딱히 그렇지 않은데도 말입니다.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 9월 8일. 9일의 손님이 도착하기까지 D-1.
디너 타임 준비를 마친 후 짧은 휴식 시간입니다.
까무룩 잠들었던 은제는 누가 깨우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눈을 뜹니다.
거리에는 뉘엿뉘엿 내리는 노을이 화려하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주방에서 매일 보는 불인데도 완전히 다른 색채입니다.
밤이 오면 정수리를 태울 듯 내리쬐던 햇볕도 한 풀 가실 테죠.
셰프만이 아니라 매니저도 종업원들도 자리에 없는 지금, 〈클라우드 나인〉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주방에서 작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빼면.

웬일로 희원이 조리대에 서 있습니다.
퓌레를 만들고 있는지 흐물흐물해진 녹색 덩어리를 고운 체에 긁어내립니다.
주변에 색색의 퓌레가 담긴 그릇이 놓여 있습니다.
은제를 발견하자 손짓으로 부르더니 숟가락을 내밉니다.



(네가 한입 맛보면) 자, 무슨 퓌레인지 알겠어?
원재료 맛을 잘 알아야 활용도 잘 할 수 있는 거야.


기준치: | 60/30/12 |
굴림: | 4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음... 이건...

버터의 풍미와 소금의 짠맛, 설탕의 단맛 사이로 원재료 자체는 향이나 맛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식감이 부드럽고 고소한 맛이 납니다.
녹색이었으니…… 신선 잠두콩 퓌레 같습니다.


계속 감고 있어, 아직 두개 남았으니까. (다른 퓌레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어준다.)
이건 어떤 것 같아?

기준치: | 60/30/12 |
굴림: | 59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설탕과는 다른 단 향이 풍깁니다. 과일인가? 사과 같기도 하고.
천천히 음미하면 쌀의 식감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끓였는지 걸리는 게 없이 아주 부드럽습니다. ……양파인가?


마지막이야. 아- 해봐.

기준치: | 60/30/12 |
굴림: | 3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부드러운 생크림의 풍미가 느껴지는 소스와 해산물 특유의 바다 냄새, 부스러지는 식감이 느껴집니다.
베샤멜 소스를 사용했으니……. 어류나 어패류, 갑각류겠군요.
생선은 메인 디시로 사용되니 아마도 갑각류, 새우일 겁니다.


세 가지 퓌레를 전부 맛보고 나면 불쑥, 눈을 뜨는 것보다 빨리 동그란 과육이 입안에 들어옵니다.
씹으면 설익은 소리가 나고……
경악할 만큼 쓰고 떫은 맛이 납니다.
기름이 푹 터지기도 합니다.


맞춰 봐.

너무 생소한데요.

후후. 절이지 않은 생올리브야.
사람이 먹을 게 아니지. (얄밉게 웃는다.)
지중해 요리에는 빠질 수 없는 재료잖아.
희원을 잘 아느냐면 대답하기 모호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그가 지중해 요리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
주방에 서면 독설을 내뱉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기 요리로 남을 해칠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어떤 사람도 보이는 것으로 단정할 수 없는 법이죠.


은제 씨도 이제 1년쯤 일했으니 메뉴 하나를 맡을 때도 됐네. 조만간 그 프랑스 요리 좀 선보여줄래?


이제 치우자. 디너 시작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두 손을 털고 너를 빤히 바라본다.)


싱크대를 닦고 그릇을 헹구고 남은 퓌레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쓸어내리면, 아직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바다 말이야?


그래, 그 쪽이겠네.




왜? 내 음식에서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맛이 나서 그러니?


그럴 때에는 '맞아요' 라고 하는 거야.


(^^) 음, 어릴 때부터 하긴 했지.

기준치: | 70/35/14 |
굴림: | 74 |
판정결과: | 실패 |
음.. 혹시 니베이씨를 아시나요.

...왜? 만났어? (살짝 심각해진 투로 묻는다.)






♬♩♪――
분위기를 깨트리고 희원의 전화벨이 울립니다.
번호를 확인하더니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집니다.
은제에게서 몸을 돌리고 전화를 받지만, 내부가 조용해 목소리를 숨기기는 어렵습니다.

... 그렇군요, 결국......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9일의 손님들을 생각하면 수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창문 너머로 하늘을 살핀 희원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내일을 기약합니다.

내일 꼭 들르겠습니다.
(끊은 전화를 내려놓는다.)
디너 타임을 준비하러 나오던 매니저가 묻습니다.
March 18, 2023 9:37PM매니저:무슨 일입니까?

March 18, 2023 9:37PM매니저: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기적이란 없는 건지……. 가보셔야 합니까?

March 18, 2023 9:37PM매니저:디너 예약이라면 양해 전화를 돌리거나 수 셰프에게 주방을 맡기는 게.

희원은 고집을 부리곤 은제의 어깨만 두어 번 두드립니다.
디너 준비하자. 그런 신호입니다.
스쳐 지나간 옆얼굴에는 슬픔이 서렸는지, 죄책감이 서렸는지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
디너 타임은 또다시 정신없이 지나갑니다.
욕설이 난무하고 덜 익거나 푹 퍼진 파스타가 날아다니고 펄펄 끓던 뜨거운 물에 덴 손가락으로도 접시와 포크와 스푼, 나이프까지 싹싹 닦은 후에야 끝이 났습니다.
그날은 라스트 오더를 조금 일찍 마감하고 〈클라우드 나인〉의 하루를 마쳤습니다.
간단히 주방의 뒷정리만 해치운 후 셰프나 직원들은 삼삼오오 퇴근했습니다.
평소라면 다음 날 런치 타임을 대비해 칼을 갈거나 식자재의 발주, 주방 점검 등이 수두룩하게 남아 있겠지만…….

어차피 내일은 9일이니 디너 타임에도 출근할 필요들 없어.
다들 푹 쉬고, 모레에 보자.
희원의 휴일 선언 덕분입니다.
매해 9월 9일엔 요일과 상관없이 무조건 디너 타임을 비워 둡니다.
그리고 ‘9일의 손님’이라고 불리는 단 한 명을 위해 헤드 셰프가 직접 주방에 섭니다.
라고 한들, 런치 타임은 정상 운영되는 데다가 각 셰프들이 준비를 돕기 때문에 레스토랑 문을 닫은 적은 없습니다.
돌발 휴일은 줄리오의 장례식을 위한 것 같습니다.
〈클라우드 나인〉의 직원 대부분 그를 아는지, 장례식에 참석하러 갔거든요.
주방의 마무리를 끝낸 은제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면 오늘따라 불 꺼진 홀이 쓸쓸해 보입니다.
화려한 실내조명, 따뜻한 음식 냄새, 먹고 마시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텅 빈 탓입니다.
내려앉은 어둠을 둘러보노라면 곧 시야에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창가에 선 희원은 평소와 달리 가벼운 차림입니다.
얇은 티셔츠는 장례식에 참석할 생각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걸까요?
유리 너머론 파도치는 밤바다만 하염없이 들썩거립니다.
해안을 따라 촘촘히 불을 켠 건물들은 잘 조립한 레고 같습니다.


장례식은... 시간이 너무 늦어서. 내일 낮에 가려고.
사위가 어둑해 정확히 가늠하긴 어렵지만……. 지친 기색은 역력하게 느껴집니다.

8년 전에 사고를 당했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해서 가족들이 사망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거든.
오래도록 찾아 헤맸는데 이젠 포기한 모양이야.


(이젠 은제가 있으니 일쪽인 부분에선 다행이란 생각 함)




기준치: | 50/25/10 |
굴림: | 3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어떤 의미로요?

지금 필요한 건 위로일까요, 의심일까요?



기준치: | 70/35/14 |
굴림: | 56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하긴.. 이 바닥에서 착하기 쉽지 않죠.
어느 쪽이건 문득 떠오르는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희원이 뭘 먹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럼... (옅게 웃는다.) 자신 있는 요리로 조금만 내어 줄래?

팬을 올리자 텅 빈 레스토랑에 비로소 훈기가 돕니다.
물속에서 소금이 끓고, 올리브유가 매끄러운 궤적을 남기고, 숨이 덜 죽은 채소가 바스락거립니다.
토마토 소스의 향이 순식간에 주방을 채웁니다.







제일 잘 하는 요리는 그건가봐, 그건 어떻게 배웠어?

대화 말미에 희원의 화법에서 공통점을 찾아냅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이런 식이었습니다.
상대의 사연을 묻고, 사정을 듣고, 사실에 귀 기울이는 태도가 무척 자연스러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사는 사람처럼…….
특히 9일의 손님에게.
일대일의 디너 타임에서 희원은 잠자코 웃는 얼굴로, 능숙하게 손님의 일대기를 끌어냈습니다.
자기 이야기는 물 흐르듯 피하는 주제에 상대 이야기는 일말도 놓치지 않는다니.
쉬운 일은 아닐 텐데도.



같이 먹어, 당신도 라따뚜이 좋아한다며.


술은? (와인잔 들고 부드럽게 흔든다.)


음, 혼자만 먹고 있긴 뭐한데. 내가 안 먹고 남이 먹는 걸 보는 거라면 모를까... 이것도 직업병이려나.
(그럼 와인잔을 다시 내려둔다.)








그걸 찾아내려고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관심갖는 게 습관이 됐어.

(술을 한모금도 안대는걸 보고서 잔을 슬 밀어주며)

잘 몰라, 내 관할이 아니었고... 너무 오래되기도 했고. (밀려오는 와인잔 보더니)
왜, 건배라도 해 주지. (집어들고는 네 쪽으로 와인잔 머리부분을 살짝 기울인다.)


건배에 의미가 있는 거지. (한 모금 마신다.)
응, 이제 난 헤드 셰프니까.

친척인가요? 분위기도 꽤 닮았더라구요.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궁금해지네, 조만간 여기 데려오지 그러니?

취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대항 판정에 성공해야 합니다!! ㅋㅋ

기준치: | 70/35/14 |
굴림: | 92 |
판정결과: | 실패 |
(물마시고 취하다)

안마실거잖아요그쵸
기준치: | 65/32/13 |
굴림: | 28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그럼 9일에 초대하는 사람의 기준 같은건 있어요? 되게 스펙트럼이 다양하던데..
추첨같은건가요?



지중해 요리중엔 좋아하는 음식 있어? 궁금해서.




나도 우리 셰프들이 만든 음식은 평가할 때 말곤 잘 안 먹어. (또 한모금 마신다.)


기준치: | 65/32/13 |
굴림: | 29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기준치: | 70/35/14 |
굴림: | 4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훌쩍..)


그쵸? 다들 그렇게 되더라구요. 아, 아까 줄리오? 그분도 좋은 사람이라면서요. 어떤 면에서 좋으신 분이였어요?

(잠시 침묵한다.)




날 의심하고 있구나.


기준치: | 70/35/14 |
굴림: | 38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준치: | 65/32/13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입가심을 마치면 냅킨으로 입가를 눌러 닦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려 그대로 제 이마를 문지른다.)
...알아.




로제타 씨는 팬이라서 초대한 것 뿐이고.
(취기로 인해 한숨을 푹 쉰다.)


(그러고는 눈을 마주치자 조용히 미소짓지만, 묘하게 입꼬리가 떨린다.)
당신이 의심할 만하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한테 물어도 소용 없어.
내가 고른 게 아니니까.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발짝 휘청이고 다시 제대로 선다.)



그래, 모레에 보자.

퇴근하고 돌아가는 길, 아스팔트의 열기도 한풀 꺾였습니다.
골목의 술집에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짠, 잔이 부딪칩니다. 흘러넘치는 맥주의 거품과 오래도록 묵힌 누룩 냄새를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여름과 가을의 경계란 열대야가 가시긴 이른 시기입니다.
유리 표면을 구르는 차가운 물방울 대신 관자놀이를 타고 땀방울이 떨어집니다.
귀가하던 중, 우연히 니베이와 마주칩니다.
그는 이미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은제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72 |
판정결과: | 실패 |
이 권유의 목적은 저녁 식사가 아닙니다. 꿍꿍이가 숨어있다는 걸 확신합니다.
니베이는 태연하게 웃으며

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눈 깜빡할 새 사라집니다.
방금 이 앞에 서 있었는데요!


기준치: | 70/35/14 |
굴림: | 5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기분나쁜 사람..)

...
기분 나쁘네요. 도대체 뭐였을까요.
-
D-day. 9월 9일의 정오.
평소라면 런치 타임의 오더를 해치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시간이지만, 오늘은 한가롭기 짝이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휴일. 이런 날엔 침대와 한 몸이 되어 한참 미적거려도 모자라는데.
〈실종자를 찾습니다.〉
“벌써 6년이 다 돼 가요. 시간이 참 야속하죠?”
“아, 그분. 제가 알기론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줄리오의 장례식이 결정됐다네.”
은제는 미적거리긴커녕 안절부절못할 판입니다.
한 달간 의심을 촘촘히 쌓은 페이스트리 파이가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5년 전 9일의 손님 닥터 아다모.
6년 전 9일의 손님 새신부 라리사.
8년 전 9일의 손님 셰프 줄리오.
그동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9일의 손님 중 넷이나 사망했습니다.
죽은 날짜도, 방법도 제각각이라 희원을 의심하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미심쩍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
……이번 9일의 손님을, 그냥 두어도 되는 걸까요?
이 시간이면 〈클라우드 나인〉에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희원은 낮에 줄리오의 장례식에 들른다고 했고,
셰프며 종업원들은 다 쉬고 있을 테니.
증거를 찾으려면 지금뿐일지도 모릅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니 뿌리에 매달린 감자처럼 수상한 점이 줄줄이 끌려 나옵니다.
젊은 나이에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헤드 셰프면서 〈클라우드 나인〉 3층에 거주하는 희원,
청소도 맡기지 않을 만큼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하던 희원의 집무실.

은제가 〈클라우드 나인〉으로 향하면 하늘보다 바다가 가까운 야트막한 언덕은 여름의 끝물인데도 연한 색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꼭짓점에 다다르면 올리브 나무 한 그루와 그 아래 숨은 청회색 지붕이 보입니다.
로마 양식의 투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불그스름한 벽돌 건물은, 알지 못하는 그리움을 들쑤십니다.
오늘도 날씨는 맑다 못해 찔 듯이 더움.
탁 트인 하늘에는 거대한 적란운이 손아귀를 펼치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클라우드 나인〉을 움켜쥘 것처럼.
기둥을 에워싼 담쟁이덩굴들이 괜히 몸을 떱니다.
매일 보던 장면인데도 알지 못하는 장소인 양 낯섭니다.
당연히 문은 잠겨 있습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35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클라우드 나인〉은 총 3층 건물입니다.
1층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며 홀과 주방, 창고가 있습니다.
2층에는 직원용 탈의실, 휴게실, 사무실이 있습니다.

3층은 희원의 생활 공간이지만...


기준치: | 70/35/14 |
굴림: | 54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함부로 침입했다간 경보가 발생할 거고…….
보안 기업에서 출동하면 아무래도 곤란해지겠네요.

(CCTV를 슥 옆으로 돌려봄)



희원의 집무실이 2층에 있으니 거기라도 먼저 가보는 게 좋겠네요.


문은 잠겨 있습니다.
열쇠공 판정이나 근력 판정해봅시다.

기준치: | 55/27/11 |
굴림: | 23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뽀각!
가볍게 문고리를 부숴서 들어갑니다...
집무실의 풍경은 평범합니다.
불을 켜지 않으면 한낮에도 밤중처럼 어둡단 걸 제외하면요.

전체적으로 둘러볼 시 관찰력 판정 합시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3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하나는 창문이 없는 완벽한 밀실이라는 것, 다른 하나는 천장 중앙에 그려진 붉은 자국입니다.
천장 중앙, 형광등 근처에 거대한 눈 같기도 하고 깨진 마름모꼴 같기도 한 기묘한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얼핏 보면 타오르는 불꽃 같기도 합니다.






차차 희미해졌는지 어떤 남자가 웃고 있다는 것 외엔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는 얼굴은 아닙니다.
닳고 닳은 모서리와 구겨진 자국이 옛날 옛적의 이야기임을 알려줍니다.


……현재 넘버는 99명.
1년에 1명씩 초대한다는 전제로 계산하면, 99년째라는 뜻입니다.
최근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99번 로제타, 98번 토마소, 97번 나오미, 96번 디에고, 95번 솔디니, 94번 아다모, 93번 라리사, 92번 이소타, 91번 줄리오…….
은제가 아는 이름도 모르는 이름도 섞여 있습니다.



(명단은 특별한게 더 없나?하고 살펴봄 뒷장까지 싹싹)

명단일 뿐이니,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더 없을 것 같습니다.


책등을 훑던 중 두 권이 눈에 띕니다.
독과 약, 그리고 홍당무.


책을 펼치면 제일 먼저 파라켈소스가 남긴 말이 적혀 있습니다.
〈모든 것은 독이며 독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용량만이 독이 없는 것을 결정한다.〉
읽어본다면 자료 조사 판정합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당연한소리 아닌가..

저자는 다양한 독과 그 양면성, 치사량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긴, 주방에서 일하는 은제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설탕조차 독이 되고 맹독으로 유명한 복어의 테트로도톡신은 용량을 조절하면 진통제로 쓰이니.

책의 내용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존재 자체로는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못합니다.


청소년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았을 쥘 르나르의 소설책입니다.

“쥘 르나르가 말하길,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변명하지 않고 저녁 식사 초대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라더군요.”
……우연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기엔 충분합니다.

책이 아니라, 책 모양의 북엔드입니다.
뽑아내면 드드득, 거친 소리가 들리더니 책장의 한 면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책장에 배열되어 있던 새하얀 조약돌들이 도르륵, 도르륵 정해진 자리를 이탈해 굴러다닙니다.
열린 책장 사이, 딱 사람 하나가 드나들 크기의 문이 보입니다.
편의상 문이라고 적었으나 문짝도 손잡이도 없이 문틀만 남아 있습니다.
문짝 대신 완벽한 어둠이 고여 있습니다.
형광등 불빛조차 거부하는 것처럼 문턱에서 빛이 단절됩니다.


인기척은커녕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지만, 빛도 통과하지 못하는 단절된 공간입니다.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을 내디뎌 문틀을 밟으면 쑤욱, 어둠에 삼켜집니다.
블랙홀의 흡입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
은제가 어떤 장소를 예상했건, 실제와는 다를 겁니다.
낮고 둥근 천장, 희미한 알 조명.
여름을 잊을 만큼 서늘한 온도와 정사각형을 다닥다닥 이어붙인 선반으로 채워진 벽면.
그 모든 선반에 얌전히 누워 이쪽을 향해 머리를 내민…….

그리고 낡은 나무 상자도 몇 개가 쌓여 있습니다.
와인 셀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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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풍스러운 라벨에는 예의 정보들이 적혀 있습니다.
출신 와이너리, 포도 품종, 생산 지역과 용량, 종류, 알코올 함량……. 돔 페리뇽처럼 유명한 종류도 있습니다.
관찰력 판정 합시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31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와인 셀러에 빈칸이 있는 건 수상한 점도, 대수로운 일도 아닙니다. 딱 한 칸이라 어쩌다 보니 눈에 띄었을 뿐.
정작 빈칸엔 볼 게 없지만, 그 줄에 놓인 와인들은 어떤 병도 라벨이 부착되어있지 않습니다.
정식 생산되는 라인이 아닌 걸까요?
라벨 대신 주둥이에 꼬리표가 달려 있습니다. 적혀 있는 것은 딱 세 종류의 정보입니다.
몇 번째 병부터 확인할까요?


첫 번째 병

2014.09.09.
Giulio
두 번째 병

2015.09.09.
Isotta
세 번째 병

2016.09.09.
Larissa
...그리고 빈 칸.


네 번째 병

2018.09.09.
Tommaso
다섯 번째 병

2019.09.09.
Diego
여섯 번째 병

2020.09.09.
Naomi
일곱 번째 병

2021.09.09.
Sold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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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덞 번째 병.

2022.09.09.
Rosetta


-식사 시간.
2014.09.09.
-생산 연도.
Giulio.
-……이름.
최근 8년간 초대받았던 9일의 손님들의 이름과 날짜가 일치합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합니다. 목덜미가 서늘해집니다.


이사람들을 마시는건가? 누가? ...뭘?
....(찜찜한 기분을 뒤로하고 낡은상자를 봅니다)

뒤져보면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전부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제목은 〈데 레 코퀴나리아; De re coquinaria〉.
은제도 이미 아는 책일 겁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고대 로마 요리서입니다.
……설마 정말 원서는 아니겠죠?

(펼쳐보며)

책장을 펼치면 글씨들이 꿈틀거리며 종잇장 위를 기어 다닙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53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벌렌가.(탁탁 침)

자료조사 판정 해봅시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72 |
판정결과: | 실패 |
(행깍.
(햇씁니다)

움직이지 않는 글씨를 발견합니다.
희원의 필체입니다.
따로 해석해둔 것 같습니다.
9월 9일, 마지막 순서에 희원은 언제나 그렇게 물었습니다.
“포도주가 입에 맞으십니까?”
듣지 못했더라도 대답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술병에 담긴 것이 포도나 누룩이 아닌 손님들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기준치: | 70/35/14 |
굴림: | 62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설마가 사람잡네..(끙

...몇장 더 넘겨볼까요?



86일이 그런 뜻이였어?
날 엿먹여?
그래요.
은제는 깨달았습니다.
겨자색 지붕, 새하얀 사람, 유백색 귀걸이, 눈이 마주친 후 느꼈던 본능적 위화감.
초면에 권하던 저녁 식사.
“86일 되는 날이 좋겠네요.”
1년의 시전 주기와 약속일이라기엔 일방적인 날짜 선택.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소나기처럼 쏟아집니다.
어쩌면 마지막 9일의 손님은 로제타가 아니라…….


기준치: | 69/34/13 |
굴림: | 6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나네. fucking 니베이.

이성 감소 없습니다.




...라틴어인가?
한참 넘기면 겨우 읽을 수 있는 내용을 발견합니다.
〈핸드아웃: 재료 선별〉을 제공합니다.


... 듣기 판정합시다.

기준치: | 60/30/12 |
굴림: | 20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끼이익, 거친 타이어의 마찰음이 들립니다.
저 밖입니다. 이렇게 급하게 도착할 사람이라면.
...

문가에 선 희원이 험악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봅니다.
평소의 새하얀 조리복이 아닌, 상복 차림입니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단어 하나.
하얀 시종.


몇 마디를 주고받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희원이 제자리에 멈춰 섭니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뜹니다.
일그러지는 표정은 앞으로 일어날 나쁜 일을 알게 된 사람 같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어?
그리고 타이밍 좋게 콰광. 천둥이 하늘을 울립니다.
적란운이 유난히 높더라니.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았다니까…….

희원은 천둥소리도 빗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은제의 어깨를 움켜쥡니다.

절 친히 찾아와줬더군요.


그 사람을 찾지 못하면 전 죽게되겠죠. 저것들처럼(술병들을 가리키며)

여태까진 슬퍼할지언정 놀라는 법이 없어 의심스러웠는데.
이런 반응을 보니 또 평범한 인간 같고.
희원은 은제에게 무어라 설명해야 좋을지 몰라 혼란에 빠집니다.

... ... 일단 나와, 듣고 싶은 게 있다면 설명해 줄게.


...뭐부터 설명해줄까.


저 술들은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술이 아니야. ...그러니까, 먼저 내 역할부터 설명해야겠네.
난 샤■■ ■을 숭배하는 교단에서 나고 자랐어. 네가 말한 하얀 시종이라는 역할이었지.
난 그분의 식사를 책임졌었어. 흡족할 만한 먹이가 가득한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주 목적이고.
하지만 그만둔지 오래야. 그런데 8년 전에 다른 하얀 시종인 니베이가 여기에 왔지.
저 술들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야. ■그■ 판의 눈에 들면 이 지구는 끝나버리니까, 구하고 싶어서 만든 술.


그럼...
죽인건 니베이고, 그 영혼들을 위해 속죄의 마음으로 마지막 식사를 준비한 후 영혼을 보관했단거에요?





물론, 술이 빚어지면서 피해를 입긴 했지만.

그 피해가 죽음이라면.. 그게 전부잖아요.

그들의 중요한 부분을 갈취해버린 건 죽음만큼 무겁다는 걸 알지만.
그 분이 디제스티보까지 먹고 만족한다면, 이 별이 통째로 삼켜질 거야. 그걸 막는 거라고.




(참담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해.
시도해보지 않은 건 아냐. 그런데도...
제물은 정해진 순간부터 신에게 귀속돼. 인력으로 돌이킬 수 없어.
D-85.
초읽기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기준치: | 69/34/13 |
굴림: | 86 |
판정결과: | 실패 |
5
dk





...?
(당황한 듯 눈동자가 빠르게 네 양 눈을 훑는다.)
미, 미친 거니? 이럴 수가...

하긴~ 그럴 녀석이긴 해. 그치?



자기 몸도 아닌데 그렇게 싹싹하게 생활했었다고... (이쪽은 발랑 까진 것 같다고 생각 함)

주인의식이 강해 걔가 좀.

떠넘겼다는 말인가... (중얼거리곤)
아무튼, 그런다고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 9일의 손님이 되어서 영혼을 일부 내놓고 시한부의 삶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당장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감스럽네.

아까 종이 쪼가리들을 같이 좀 읽어봤는데 말이야.


꿈틀꿈틀거리는 종이들이 말해줬어.

이미 실패했기 때문에 낙인이 찍힌 거야.

난 딱 30살까진 살고싶었는데 말이지~

(말만 들으면 꼭 전혀 다른 사람 같네... 가만히 네 얼굴을 살피다가 문득)
...인격.
영혼...


물론 해주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도망치게 해줄 수는 있을 것 같아.
아니, 네가 착실히 지켜주기만 한다면. 해줄 수 있어.
다른 곳으로 보내줄게. 물론, 어디까지나 눈속임에 불과하고 이것저것 제약이 뒤따르겠지만.
어때, 들어볼래?
희원이 도망자 신세로 〈클라우드 나인〉에 정착한 것처럼요.
은제도 하얀 시종이나 포식자의 시야로부터 도망치라고 종용합니다.
평생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하겠지만, 부자유가 죽음보다 낫다면 하나의 방법일 겁니다.


네 존재가 이 방법을 떠오르게 해줬어. 한 건 했으니 주도권 좀 자주 달라고 해.


그래도 상은 줘야지 않겠어.
저쪽 은제 씨는 먹는 건 좋아하니?


(손 떼야지) 그래, 그렇게 하고.
어때? 들어볼래?


이동 반경이 광범위해지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내가 지나온 별 중 가장 안전한 곳으로 보내줄게.
희원은 그리 설득하지만,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별로 떠나기가 어떻게 쉽겠어요.
무엇보다 식후주를 마시지 못한 ‘그’ 위대한 이가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입니다.
희원 또한 지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부정하지 못합니다.
작은 방에는 2인분의 숨소리만.
들숨과 날숨이 한 번 교차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면 미칠 지경입니다.
이 와중에도 배는 고파옵니다.
아무리 굶주리면 독이 든 케이크도 먹는 게 인간이라지만.


기준치: | 70/35/14 |
굴림: | 6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책장을 넘기며 읽었던 문구가 뇌리를 스칩니다.
〈차차 익숙해지시도록 조금씩 차례대로 맛보시게 한다.〉
그러고 보니, 왜 번거롭게 9년에 걸쳐 맛을 보는 거죠? 단숨에 먹어 치우면 될 텐데.
덩달아 쾅! 바깥에서도 큰 천둥이 터집니다. 분명히 아까 메모에선…….
〈지나치게 질이 나쁘거나 끔찍한 맛이 나는 음식은 거부하신다.〉


왜 9년에 걸쳐서 맛을 보는거죠?

새로운 땅의 식자재는 모두 낯선 맛과 성분이니까, 식전 요리부터 하나씩 맛보게 하는 거야.
한꺼번에 진상하면...
말하다 말고 희원이 고개를 번쩍 듭니다.



자, 이 와인 셀러에는 최대 9년을 숙성한 영혼이 일곱 보관되어 있습니다.
식후주는 본디 독하기 마련이라지만, 그 어떤 독한 운명도 온전한 1명과 7명의 농축분만은 못할 겁니다.

아무리 가볍고 담백한들, 고작 한입 크기인들, 입맛을 돋울 새콤한 풍미를 품었다고 한들, 마냥 이로운 곡류 요리이거나 가장 연하고 부드러운 고기인들, 공들여 숙성한 치즈인들, 신선한 채소인들. 달콤하기 짝이 없다고 한들.
전부 뒤섞으면 입에 넣자마자 게워내고 싶을걸요.
신이라니 독살할 수는 없겠지만, 쓴맛은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시간도 날짜도 인간의 개념이니 그릇 위에 올라오는 건 매일 밤 먹어 치우시거든.
그래도....
그분을 영접하는 건 신도들도 어려워해. 안전을 보장할 수 없지만, 무사히 돌아오더라도 미쳐버릴지도 몰라.
말 그대로 미친 도박이지. 이건 각오가 필요한 일이야.

한 몸에 2개의 영혼일 때부터 전 정상이 아닌거에요.
걱정마세요.



각오를 드러내면 와인 셀러를 뒤져 술병 9개를 꺼냅니다.
그리곤 은제의 손목을 낚아채 1층으로 내려갑니다.
희원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클라우드 나인〉의 입구에 CLOSE 팻말이 걸리고 핸드폰의 다이얼이 순식간에 완성됩니다.

미안.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게. (뚝)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바에는 어느새 3개의 와인 잔이 올라와 있습니다.

당신은 총 석 잔을 마실 거야.
순서대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라벨도 꼬리표도 없는 병입니다.

뭔지는 몰라도 돼. 정신적인 충격이나 신체적인 통증을 완화해 줄 거야.
진통제라고 생각하고 마셔.


두 번째 잔은……. 이미 알고 있지.
술병이 희미하게 들썩이는 것 같습니다.
착각인지 사실인진 모르겠지만.
희원은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려 은제의 눈만을 바라봅니다.


(그러고는 마지막 잔을 밀어준다.)
세 번째 잔은 나야.
주문의 작동 원리는 이미 알고 있지?


그리고 나까지, 총 열명... 무언가를 한다면 확실히 해야지.

그는 지금 당신에게 영혼 일부를 내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잃을지 모르는데도.


후... 알았어요.
제발 별 영향력 없는걸 가져갔으면 좋겠네요.
설명이 끝나면 코르크 마개를 따는 대신 주방에서 앞치마를 찾아옵니다.
검은 정장 위에 흰 앞치마라니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닙니다.
셔츠에 기름이 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희원이 달군 팬에 올리브유를 붓습니다.

네가 겪은 적도 없는 삶의 파편을 삼키는 거니까.
그러니 제대로 먹어둬야지.
빈속에 쏟아부으면 속 쓰리니까...
뭐가 먹고 싶어?


...그래, 그럼 브렌지노 살레랑 카포타나로 해볼까. (웃는다.)
올리브유가 팬 위에 둥글게 원을 그리며 고소한 향취를 풍깁니다.
미리 배를 갈라 레몬과 마늘, 회향풀과 같은 각종 향신료를 채우고 소금 반죽해두었던 농어를 꺼내 오븐에 넣고 타이머를 맞춥니다.
팬이 달궈지는 동안 가지와 양파, 셀러리에 양파, 토마토까지 숭덩숭덩 썰어냅니다.
올리브유가 넉넉할 때 셀러리, 양파, 토마토 순으로 부은 후 향기가 충분히 배도록 팬에 달달 볶습니다.
토마토에서 나온 물로 한소끔 끓인 후 가벼운 붉은색이 돌 때까지 뭉근하게 저어줍니다.
충분하다 싶으면 바싹 튀긴 가지와 그린 올리브, 케이퍼를 더한 다음 마지막에 식초와 꿀로 간을 맞춥니다.
서둘러야 하니 팬째로 얼음물에 담가 식히면서 그사이 농어를 꺼냅니다.
나무망치로 노릇노릇하게 탄 소금 반죽을 깨트리면,
육즙은 고이고 향신료 덕에 비린내는 찾아볼 수 없는, 짭조름한 브렌지노 살레가 완성됩니다.
흰 빵과 차갑게 식은 카포나타를 곁들여 테이블에 올라옵니다.

맛있게 드세요.


돌아오면 배우고 싶은 요리는 있어?


...교수님이 라따뚜이를 해서 먹이셨다고 하셨지.
나도 방황하던 한 때, 이 브렌지노 살레를 만들어 준 사람이 있었어.
아마 그때부터일 거야. 내가 여기에 마음을 품고 도망치기로 결심한 게.


낯선 곳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는데,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천천히 먹어, 어쩌다 보니 은제 씨가 9일의 손님이 되었네. 후후... 이런 경험 한 적 없지?


고마운 말이네...(후후 웃고) 지긋지긋한 신의 눈에서 벗어난다면, 언젠간 다른 분야도 도전해볼까.


예상하건데, 다른 걸 취미삼아도 요리는 버리지 못할지도 몰라.
은제 씨는 어때? 아직 신입이지만, 다른 길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

혼자인게 좋은 저한테 여러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직업을 가진다는건 어찌보면 행운이죠.

그리고 가끔은 네 다른 인격에게도 그 즐거움을 알려줘. 왜 소개도 안 해줬담?


네가 잘 가르쳐 봐. 아니면 내가 가르치는 것도 딱히 마다하지 않을 수 있는데. (정든램지)


그래, 고마워. (빈 그릇을 보면)
희원이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오늘의 제물이랑 널 바꿔치기할 거야.
계획한 대로만 차질 없이 진행된다면 다신 이 별에서 난 것들은 입에 대고 싶지도 않다고 치를 떨겠지.
입맛이 엄청 까다롭거든.
셀러리와 자투리 야채로 테이블 위에 대략적인 약도를 그려 줍니다.

문을 열어주면 넌 바로 그 위로 떨어질 거고.
가장 어두울 때, 동트기 직전에 올 거야. 감로주를 먹긴 했지만 되도록 눈을 뜨지 마.
송곳니가 아니라 흡혈판으로 피를 빨아 마시는 식이라 아프진 않겠지만……. 느낌이 좋진 않을 거야.
그래도 억지로 잡아 빼면 안 돼. 오히려 부러질 수 있어.
관건은 게워낸 다음이야. 식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백이면 백 날뛰어 댈 테니.

...
낮이 밝으면.
샤■■ 판이 잠들면 바로 데리러 갈게.
사지로 나아가는 건 은제인데, 희원이 더 긴장한 것 같습니다.
그는 몇 번이고 걱정하지 말라고, 잘될 거라고, 지켜보고 있겠다고 은제를 다독거립니다.

은제는 9명분의 삶을 머금고 기꺼이 신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밉니다.
끔찍하게 혼합하고 농축한 맛에 그 위대하다는 이가 삼켰던 것들을 게워내면 동이 틀 때까지 동쪽으로 달리면 끝입니다.
반드시 데리러 가겠노라고, 희원은 약속했습니다.
계획이 이해가 되면, 그제서야 감로주의 효능이 들기 시작하는지 살짝 정신이 몽롱해집니다.
몸과 마음이 잠깐 정지하는 것 같습니다. 주변이 멀게만 느껴집니다.

몽롱한 기운을 버티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 잔에는 7명 분의 영혼이 담겨있었죠.
아페르티비, 이름은 줄리오. 가볍고 담백한 향기가 소박한. 그 정체는 동경.
스투치키니, 이름은 이소타. 옅은 미색의 빛나는 표면. 그 정체는 예술.
안티파스티, 이름은 라리사. 시리도록 차가운 마음을 담아. 그 정체는 사랑.
세콘디 피아티, 이름은 솔디니. 목 넘김이 가장 매끄러운. 그 정체는 행운.
콘토르니, 이름은 디에고. 입안에서 황홀하게 요동치는. 그 정체는 꿈.
포르마지, 이름은 나오미. 일평생 공들여 숙성시킨. 그 정체는 지혜.
돌체, 이름은 토마소. 피가 끓을 만큼 뜨겁고 달콤한. 그 정체는 모험.
타인의 인생을 취하는 건 위대한 이나 즐길 악취미입니다.
아무런 맛도,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았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희원은 마지막 빈 잔을 들고 기다립니다.

우선 희원이 순순히 협조하는 만큼 정신력 대항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술자인 은제는 우주 감로주의 효과로 이성 감소가 절반(1D5)으로 줄어듭니다.
희원은 그대로 이성 1D20점을 잃습니다. 단기 광기, 장기 광기가 발생하지 않는 대신 영혼이었던 일부, 희원의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습니다.





주조된 술은 정해진 병에 차오릅니다.
원래는 로제타가 되었을 빈 병입니다.

은제가 그것을 잔에 따르면 은은한 유백색을 띱니다.
마십시다. 마지막 잔입니다.


마지막 잔까지 비우고 나면,
여러 사람의 인생이 마음에 스며들어 정신을 유지하기가 서서히 어려워집니다.
여러 사람이 끊임없이 귀에 속살거립니다.
“셰프와 일할 수 있다니 꿈만 같아요.”
“저는 아직 브랜드도 없고…….”
“결혼식 식사, 정말 안 맡아주실 거예요?”
“내 인생은 여러모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올림픽은 가슴 떨리지만, 먹고 싶은 걸 참는 건 솔직히 힘들어요.”
“후회가 없을 때까지 후회하게.”
“왼쪽 눈은 그놈의 창에 찔린 거야.”
자신의 동경, 예술, 사랑, 행운, 꿈, 지혜, 모험,
“희원 씨, 너무 지치고 힘든 날엔 꼭 따뜻한 걸 드세요.”
종내에는 희원의 소중했던 사람이 알려준 다정을.


기준치: | 70/35/14 |
굴림: | 82 |
판정결과: | 실패 |
계속해서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를 만난 적도 없는데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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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버터보다 올리브가 훨씬 낫죠?"
“하는 일이 안 풀려요? 젤라토 좀 줄까요.”
"오늘은 사과가 좋더라고요! 수프 끓여줄테니 드시고 가세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글쎄요……. 아무래도 추억의 음식 아니려나요."

스스로를 잊어버리지 마.
고개를 들면 희원과 눈이 마주칩니다.
자신의 자리를 뛰쳐나와 돌아갈 곳도 없는 사람이 보입니다.
이 추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갈 희원의 권태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이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가.
근본을 아우르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잃고도 희원은 계속 〈클라우드 나인〉의 유폐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요?
희원은 은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단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곤 창밖을 내다봅니다.
지나가는 소나기일 줄 알았더니 여태 쏟아지고 있습니다.
먹구름 때문에 한층 어두워 보이지만 아직 초저녁에 불과합니다.
동트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 되려면 한참 남은 셈입니다.


콱. 식칼을 바닥에 찍은 희원이 촘촘하게 선을 긋기 시작합니다.
시간과 공간의 좌표를 새겨넣고 위도와 경도를 따라 경계를 나눕니다.
테두리를 따라 출발지부터 도착지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행성의 이름을 순서대로 새깁니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을 그어 관문에 피를 먹이자 불온한 빛으로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주문을 왼 희원은 멀쩡한 쪽으로 손짓해 은제를 부릅니다.


최종 확인을 걸친 후엔 입성을.
한 발자국. 딱 한 발자국을 내디뎌 테두리를 밟으면 쑤욱, 어둠에 삼켜집니다.
블랙홀의 흡입력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정신을 차리면 딱딱한 곳에 누워 있습니다.
옅은 멀미가 이는지 귓속이 살짝 먹먹합니다.
어느새 빗소리는 그쳤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희원이 말한 풍경입니다.
대리석으로 세운 파빌리온. 지붕과 기둥으로만 구성된 신전은 바깥의 경치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황폐한 땅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데, 오래도록 가물었는지 표면이 갈라지고 터져 거칠기 짝이 없습니다.
은제가 도착한 둥근 제단은 말마따나 그릇처럼 생겼습니다.
외따로 먼 땅에 떨어졌다는 것을 실감하지만, 위기감은 들지 않습니다.

눈을 감건 감지 않건 곧 거대한 땅울림이 입니다.
쾅! 쾅! 쾅!
가장 바깥의 기둥이, 두 번째 기둥이, 세 번째 기둥이, 네 번째 기둥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집니다.
소리만으론 행성이 흔들리고 지축이 뒤틀리는 것 같은데.
단순히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이런 위압이라니.
저것의 정체를 가늠하기도 두렵습니다.
눈을 감고 기다리면 딱딱하고 거칠거칠한 것이 은제의 몸 위를 스칩니다.
손가락은 결코 아닐, 정체불명의 신체 말단이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릇 위 형태를 식별하는 절차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풍미를 즐길 작정인지 물컹물컹한 끄트머리가 뺨을 훑습니다.
얼굴을 전부 뒤덮을 만큼 거대한 규모.
감은 눈 위로도 쏟아지는 검은 그림자가 선명합니다.
불쾌한 점액질이 피부를 적시기 시작합니다.
틀거리는 작은 촉수들이 혈액이 흐르는 큰 줄기를 찾아 목과 어깨 사이에 안착하고.
툭, 피부가 터지고 피가 새기 시작합니다.
무딘 관이 틀어박히는데도 아프지는 않습니다.
다만, 체내의 모든 핏줄이 터지는 것처럼 강한 압박을 받습니다.


머리가 욱신거립니다.
심박이 확연히 느려집니다.
바로 그때.
――――――――――.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노성이 하늘을 울립니다.
짐승의 울부짖음도 사람의 애곡도 아니며 괴물의 포효도 아닙니다.
아주 빠르게 지껄이는 욕설, 혹은 세계 모든 언어를 뒤섞어 퍼붓는 저주 같습니다.
산속의 공포, 샤그나 판이 날뛰기 시작합니다.
끔찍한 것을 맛보았으니 입을 헹구고자 합니다.
은제가 아닌 다른 제물을 먹어 치울 작정으로 비대한 몸을 일으킵니다.
거대한 코가 은제를 저 멀리 내던집니다.


기준치: | 65/32/13 |
굴림: | 2 |
판정결과: | 극단적 성공 |
한 바퀴 구르고 멈춥니다.
온몸의 근육이 욱신거려도 부러진 곳은 없습니다.

이 악독한 미식가는 맛없는 식자재에 관심이 없지만, 존재 자체로 위협적입니다.


(저 돼지맘모스XX..)
기준치: | 65/32/13 |
굴림: | 27 |
판정결과: | 어려운 성공 |
아슬아슬하게 바로 옆으로 거대한 촉수가 떨어집니다. 대리석이 형편없이 갈라질 정도의 위력입니다.
파편이 튀어 피부에 생채기를 입습니다.

회피 판정!

기준치: | 65/32/13 |
굴림: | 97 |
판정결과: | 실패 |
(이럴줄 알았어)
날카로운 송곳니가 머리를 후려치고 지나갑니다.
다행히 쓰러진 기둥에 걸려 목이 잘리진 않았지만…….
돌덩이가 관자놀이를 때리고 떨어집니다.
피가 쏟아져 한쪽 시야만 붉게 점철됩니다.


2
간신히 샤그나 판의 영역에서 벗어나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립니다.
저 멀리 몸부림치는 주인에게 섬기는 자들이 달려가는 게 보입니다.
선두에 선 것은 흰옷을 입은 자, 니베이입니다.
진노한 주인은 자신을 진심으로 공경하지 않고 돼지나 먹을 법한 쥐엄 열매를 바친 태만한 종을 용서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제물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날뛰는 신과 울며 비는 신도들.
그러나 그 풍경은 가까이에서 보아도, 멀어져서 보아도 추잡하기만 합니다.
신성하긴커녕 이성 없는 한낱 짐승과 죽음을 자초하는 불나방을 연상시킵니다.


동쪽으로 달릴수록 비정상적인 신앙과 멀어집니다.
절뚝거릴지언정 멈추지 않고 내달리면 어느 순간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여긴 지구가 아니니 태양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날이 밝습니다.
끝났다.
안도가 밀려오려는 순간,


기준치: | 45/22/9 |
굴림: | 45 |
판정결과: | 보통 성공 |
목 안쪽에서 신맛이 느껴지더니 순식간에 허리가 꺾입니다.
토해낼 것도 없는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헛구역질이 올라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은제를 지배합니다.
위장에 삼켰던 모든 식자재가 식도로 치밀어오를 듯.
게워내면 술만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눈앞이 흐릿해집니다.
시야 끝에 불투명한 베일이 흔들립니다.
생리적인 눈물 때문인지 형태 없는 존재를 목격하는 중인지 모르겠습니다.
“노인네, 어딜 가면 간다고 말이라도 하지…….”
“다 늙은 자식이어도 어머니가 필요하단 걸 아실 분이 어찌 이리 야속하세요.”
“참 아까운 목숨을 잃었어. 그놈이라면 더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달라는 대로 줄 터이니 내 아들 좀 찾아주시게, 선생!”
“의사 선생님은 몇 밤 자야 와요?”
“네가 혼자 너무 오래 외롭지 않아야 할 텐데. 어머님 걱정은 하지 마.”
“이소타의 데뷔작, 추모 전시하기로 했대. 우리 같이 보러 갈까?”
“다음엔 주방에서 고생하지 말고 남이 해주는 밥 먹고 살아, 인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들의 찌꺼기가 생전에 지녔던 가장 큰 조각을 돌려받으러 왔노라고. \
머리 위로 완전히 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오래도록 병 안에 갇혀 있던 삶의 일부는 젖은 흔적도 없이 휘발되었습니다.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자들이 고했을 인사와 함께 영영 떠나갑니다.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면 한결 속이 편안해집니다.
진노한 미식가도 아침을 맞아 잠들었는지 사위에 고요한 흙먼지만 내려앉습니다.
아무도 없는 바닥에 큰 원이 그려집니다.
불규칙한 그물 형태의 분할, 알고 모르는 별들의 이름.
다시 한번 관문을 넘어.
시간을 건너고
공간을 접으면
자잘한 화상 물집과 생채기, 굳은살이 희미한 흔적처럼 남은 손이 당신을 잡아당깁니다.


희원은 고생했다며 은제의 어깨를 두드려줍니다.

한참 바라봐도 위장은 잠잠하기만 합니다.
마지막에 마신 잔은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희원의 얼굴은 예상보다 괜찮아 보입니다.
권태도 공허도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웃고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또 채울 수 있겠지.
어쩌면 말이야...
이미 치사량이었던 걸지도 몰라.
(후후, 웃고는 주방에 들어간다.) 그래, 스프 끓여줄게.
해안가 언덕을 움켜쥐었던 적란운은 물에 젖은 솜사탕처럼 흐릿해졌습니다.
끝모르고 치솟았던 구름을 얼기설기 가르는 구멍은 모두 눈부시게 빛나고 있습니다.
어떤 구름이라도 그 뒤쪽은 은빛으로 빛난다는 말을 증명하듯.

보상: 소모한 이성의 완전 복구, 우주 감로주 반병, 연봉 인상.
정희원

연은제

9일의 손님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여배우 로제타는 다른 날 무사히 식사를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1년이 훨씬 지나도 승승장구하는 소식만 들려옵니다. 나쁜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샤그나 판
